고대 그리스의 교육: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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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의 '''[[교육]]'''은 [[폴리스]] 형성기에 시작되어 [[헬레니즘 문명|헬레니즘]]기를 거쳐 [[로마 제국 시대의 그리스|고대 그리스 후기]]에 이르는 기간의 교육과 관련된 사항들을 의미한다. [[호메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교육은, 기원전 5세기경에 등장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결부되어 이후 [[플라톤]] 및 [[이소크라테스]] 등과 같은 [[소피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체육학교[귐나시온]에서의 교육은 시민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 세계는 [[문학]], [[철학]], [[예술]], [[과학]]을 처음으로 만들어 탁월한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그리스 문화는 고대정신의 핵심을 이룸으로써 서양문화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문화는 [[서양 교육사|서양교육의 발전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양교육의 역사적 전형을 고대 그리스 교육에서 찾을 수 있으며, 고대 그리스의 교육적 정신과 가치들이 서양 교육정신의 주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교육사상과 이론 그리고 교육실제는 서양 모든 나라의 교육이론과 교육실천을 형성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초기의 교육==
[[파일:Sites mycéniens.png|thumb|right|300px|그리스 문명 태동기의 지역]]
[[고대 그리스]]의 초기 시기는 [[고대 아테네|아테네]]나 [[스파르타]]와 같은 [[폴리스]]가 형성되기 이전인데, 이 시기에 쓰여진 기록은 단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 시기를 묘사한 기록은 그리스의 시인 [[
사실, [[일리아드]]와 [[
그런데 위의 문헌에서 나온 것과 같이 당시에 과연 [[웅변|변론]]이 인간에게 주요한 기술이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
한편, [[
[[헤시오도스]]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이러한 [[성인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인간의 어떤 행동이나 혹은 특정한 어떤 사람이 부족 전체에 저주를 몰고
==스파르타의 교육==
[[File:Ancient sparta theater.jpg|thumb|right|250px|[[스파르타]] 유적]]
[[스파르타]]라는 국가의 독특성과 효율성의 기초가 되었던 교육체제는 기원전 9세기에 [[리쿠르고스 (스파르타)|리쿠르고스]]의 입법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통설에는 2중의 오류가 있음이 많은 교육사학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ref name="ssfdasadfjl">《서양교육사》, 윌리엄 보이드, 교육과학사, 2008년., 40페이지</ref>. 먼저, 리쿠르고스가 한 것이건 누가 한 것이건 간에 어떤 입법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여겨지는 스파르타식 생활의 특징은 당시 [[고대 그리스]] 세계의 공통적인
기원전 7세기 말경까지 [[스파르타]]인들은 [[고대 그리스|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도시국가]]들과
이러한 [[스파르타]]의 변화는 그들의 인구 구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스파르타에는 지배계급보다 농노와 거기에 오래전부터 거주하고 있던 원자유민들의 인구가 훨씬 많아서 권위적 지배를 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국토의 경작 가능한 부분을 여러 개의 할당지로 분할하고 그 각각을 국가 농노의 경작에 의해 한 사람의 중무장 보병[helot]과 그 농노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하여 사회적인 문제와 군사적인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스파르타의 지도자는 기존 귀족 체제에 입각하여 군인의 국가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국민의 생활방식 전체를 재조직하였다. [[리쿠르고스 (스파르타)|리쿠르고스]]건 아니건 이러한 생활방식의 재조직을 이룩한 사람은 상당한 지혜를 갖고 국가의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는 그것에 부합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스파르타의 전통에 맞는 올바른 교육과 훈련을 모든 시민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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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도시국가]]에서는 부모들이 각각의 자녀를 거의 자신의 의사에 따라 마음대로 교육해도 좋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에서는 국가가 정하는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질 수 없었으며, 국가로부터 토지를 할당받을 수도 없었다. 스파르타에서는 성인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아동의 생활도 모든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신생아는 태어난 지역의 장로들에게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만일 허약한 아이로 판정되면 저절로 죽도록 내버려 두거나 농노들에게 넘겨주었다. 이 검사에 합격한 신생아는 일곱 살까지는 가정에서 어머니의 손에 양육되다가 그 이후에는 가정의 통제에서 지역사회와 국가의 통제로 이관되었다.
7~8살까지는 남성 아동들은 점차 단계가 높아지는 여러 단계의 훈련을 받는다. 이러한 훈련을 거쳐 18세가 되면, '에페보스(ephebos; 사관후보생)'가 되며 이때부터 허드렛일과 같은 사소한 훈육에서 벗어나게 된다. 에페보스는 지방 각지로 파견되어 비밀리에 농노들의 동정을 살피는 임무를 수행하며 변방 수비 임무를 띠고 군인으로 복무하는 일을 한다. 이러한 시보훈련은
[[스파르타]]의 교육의 전반적 성격을 결정한 것은 군사적 효율성에 대한 것이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동과 성인의 일상생활은 모두 군대의 병영생활과 조금도 다름없이 엄격하였다. 남자 아동들은 사시사철 맨발로 다녔으며 홑옷을 입었다. 한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처럼 음식은 거칠고 침대는 딱딱하였다. 매일매일 스파르타인들은 수영이나 사냥과 같은 운동과 야외 활동으로 여념이 없었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스파르타인들은 끊임없는 감독 하에 있었다. 7세가 되어 어머니 곁을 떠나면 남자 아동은 그 아버지들이 전쟁에 대비하여 조직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역별로 '도(徒)', '제대(梯隊)'에 소속되어 층층이 계급별로 조직된 장교들 밑에서
제대(梯隊) 내에서 가장 용감하고 재주 있는 청소년은 제대장으로 임명되어 일종의 준사관으로 일을 하였다. 제대에서의 훈련은 '에이렌(Eiren)<ref>훈련 과정을 이수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사람</ref>'의 지도아래 이루어졌다. 에이렌 위에는 '파이도노모스(paidonomus)'라는 국가의 관료가 있어서, 여러 부관들의 보위를 받으며 부대를 지휘하였다. 이들 직업적 군인 이외에도 모든 성인시민은 누구나 아동들이 하는 일을 예리하게 지켜보면서 정규 훈련관을 대신하여 아이들을
[[스파르타]]의 교육은 전반적으로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거기에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면에서 재치 있고 영리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가르치는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 예를 들어, 에이렌(Eiren)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아동들을 밖으로 보내어 저녁거리에 사용할 장작과 채소를 훔쳐오게 하였다. [[플루타르코스]]는 「[[리쿠르고스 (스파르타)|리쿠르고스]] 장」에서
[[스파르타]]의 교육은 재치있고 민첩한 인간을 길러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안목이 좁은 시민을 길러내었다. [[이소크라테스]]의 저술에 의하면, 보통의 스파르타 인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스파르타 인들은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글 읽는 것을 배웠다는 [[플루타르코스]]의 저술에 의하면, 이소크라테스의 그 말은 사실과 다르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이 어떠하건, 글 읽는 것을 스파르타인들은 대수롭게 여기지
그런데 [[스파르타]]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여성에 대한 교육이었다.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도시국가]]에서 여성은 가정의 울타리에서 외부 세계와 격리되어 자랐으며 가사에 관계되는 것 이외에는 교육을 받을 수도, 교육을 받지도 않았다. 스파르타인들은 교육을 실용적인 목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여성들이 집 밖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도록 했고, 용감하고 의지 굳은 남자 아이의 어머니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남자와 거의
==아테네의 교육==
[[파일:Solon.jpg|thumb|right|190px|[[아테네]] 교육의 기초를 마련한 [[솔론]]]]
[[고대 아테네|아테네]]의 교육은 곧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스파르타]]와 [[크레타]]를 제외한
[[아테네]]의 교육의 기원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널리 알려진 바로는 [[솔론]]이 교육에 대한 최초의 입법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솔론은 모든 남자 아이가 수영과 읽기를 배우도록 법으로 정하였고, 학교와 체육학교[palaistra; 레슬링 도장]의 운영에 대한 여러 규정을 제정하여 특별히 임명된 관리로 하여금 그것을 시행하도록 했다. 이러한 규정은 스파르타의 교육체제의 확립과 거의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사실은 교육문제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차이점이 아주 오래전에 기인된 것임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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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의 교육입법자와 달리 [[솔론]]은 그 당시 학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교과나 그 당시의 교육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하지 않았고, 다만 학생의 연령과 등급, 파이다고고스(paidagōgos)<ref>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동 보호자' 또는 '아이를 이끄는 자'이다. 아이가 성년(18세)가 될 때까지 아이의 등하교 길을 따라다니고, 학교에 있는 동안 지켜보아 주는 등, 아이의 바깥나들이에 따라다니는 노예를 의미한다. 즉 부모나 선생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 대신 아이를 돌보아 주거나 감독하는 가노(家奴)를 이른다.</ref>의 자질, 등하교 시간, 학교 구역 내 성인의 출입금지 등을 법률로 제정하였다. 이는 대체로 학생들에 대한 도덕적 영향을 염두에 둔 것들이다.
[[솔론]]이 제정한 그러한 법률이 있었다는 것은 곧 당시 [[아테네]]에
===구교육===
[[아테네]]의 교육 중
이 시기에 [[아테네]]의 교육과 [[스파르타]]의 교육 간의 차이는 계속 커져갔다. 하지만 두 경우를 모두 교육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최소한 한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즉, 두 국가에서의 교육은 모두 실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아동들에게 국가의 일원으로서 성인 활동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데에 직접적인 목적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생활방식이 달랐던 만큼, 두 국가에서의 교육에서도 그와 동일한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타의 소년은 '군인 시민'이 되도록 훈련된 반면에, 아테네의 소년은 전쟁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구교육 시기에는 체육이 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사실, 이 시기에 국가 당국이 교육에 관심을 갖는 부분은 체육 분야가 유일했다. 소년들은 훈련을 받기 위해 ‘사설 체육학교[palaistra; 레슬링 도장]’에 다녔다. 소년기를 갓 벗어난
체육학교[palaistra]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7~8세)은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 단계이고, 신체적 조건이 보통의 운동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자세와 가벼운 신체적 동작을 배우면서 공놀이와 같은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할만한 여러 놀이를 학교에서 배웠다. 본격적인 체육훈련은 그 효과가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12~13세부터 시작되었다. 이 나이의 소년들은 높이뛰기, 달리기, 씨름, 창 던지기, 원반 던지기 등으로 된 ‘오종경기(Penthalon)’의 기술을 습득하기 시작했고 또 아마 체육관 바깥에서 그리스 민족의 전통 무용을 배울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전쟁에 적합한 몸을 갖춤은 물론, 우아하고 잘 발달된 몸매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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