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교육: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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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의 '''[[교육]]'''은 [[폴리스]] 형성기에 시작되어 [[헬레니즘 문명|헬레니즘]]기를 거쳐 [[로마 제국 시대의 그리스|고대 그리스 후기]]에 이르는 기간의 교육과 관련된 사항들을 의미한다. [[호메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교육은, 기원전 5세기경에 등장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결부되어 이후 [[플라톤]] 및 [[이소크라테스]] 등과 같은 [[소피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체육학교[귐나시온]에서의 교육은 시민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고대 그리스]]에서는의 교육은 정규교육과 비정규교육비정규교육의 모두가형태로 이루어졌다. 정규교육은 고용된 교사(tutor)나 파이다고고스(paidagogos)라는 교육을 전담하는 노예에 의해 개인적인 교습의 형태로 이루어지거나 공립학교에서공공 제공되는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었다. 비정규교육은 자발적인스스로 교육자(teacher)들이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 제공하는 교육이었는데, 이것은 대중을 대상으로 행해지지는 것이연설과 같은 성격이 아니라 특정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교육은 인간의개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요소 중 하나였다. 한 개인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받는 교육의 내용이나 교육의 수준이 천차만멸이었으며천차만별이었으며, 교육이 이루어지는 지역마다, 교육자의 가치관에 따라 교육방식과 내용에서내용에 차이가 나타났다있었다.
 
일반적으로대부분의 경우에,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정규 교육의 대상은 남성에게만 한정되었고, 여성, 노예, 외국인 등은 교육의 수혜를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어린 소녀는 가정에서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비정규교육을비정규적인 형태의 교육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가정주부로서 어떻게 집안일을 하고 자신의 남편에게 어떻게 봉사하는 지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여성의 역할은 가정을 돌보는 것, 자녀의 양육, 음식의 제공, 의류의 제작 등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에서는 다른 그리스의 [[폴리스]]와는 다르게, 여성에게 여러 역할을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여성에 대한 정규교육이 제공되었다.
 
[[고대 그리스]] 세계는 [[문학]], [[철학]], [[예술]], [[과학]]을 처음으로 만들어 탁월한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그리스 문화는 고대정신의 핵심을 이룸으로써 서양문화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문화는 [[서양 교육사|서양교육의 발전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양교육의 역사적 전형을 고대 그리스 교육에서 찾을 수 있으며, 고대 그리스의 교육적 정신과 가치들이 서양 교육정신의 주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교육사상과 이론 그리고 교육실제는 서양 모든 나라의 교육이론과 교육실천을 형성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초기의 교육==
[[파일:Sites mycéniens.png|thumb|right|300px|그리스 문명 태동기의 지역]]
[[고대 그리스]]의 초기 시기는 [[고대 아테네|아테네]]나 [[스파르타]]와 같은 [[폴리스]]가 형성되기 이전인데, 이 시기에 쓰여진 기록은 단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 시기를 묘사한 기록은 그리스의 시인 [[호머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오디세이아]] 정도가 있다.
 
사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오디세이아]]에는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거의 없고, 또 글을 쓰거나 시를 짓는 등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마땅히 할만한할 만한 행동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다. 이는 초기 그리스 시대에는 공식적인 교육의교육 체계가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호머호메로스]]의 시에서 교육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은 [[아킬레스]]의 훈련을 다룬 두 부분인데, 일리아드 9권에서9권에 [[피닉스]]가 아킬레스에게 '너의‘너의 아버지가 어른들이 서로 다투어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 참혹한 전쟁이나 정치적 집회에 대한 기술이 없는 어린 아이인 너를 집에서 내보내 나를 선생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너의 아버지는 너를 말과 행동, 이 두가지에서두 가지에서 모두 뛰어난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라고 나에게 보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라고 나온다말한다. 이 구절은 당시 지배계급의 젊은이를 위한 교육에서 [[웅변|변론]]과 무술이 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문헌에서 나온 것과 같이 당시에 과연 [[웅변|변론]]이 인간에게 주요한 기술이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오디세이오디세이아]] 1권에 역력히 나와기술되어 있는 것과 처럼,같이 당시 [[고대 그리스]] 초기에도 변론이 상당히 중요했던 것은 확실하다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 시기의 교육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교육이 전적으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졌고 말과 행동에 대한 이중의 훈련에 대한 책임과 권한이 전적으로 자녀의 아버지에게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 [[호머호메로스]]의 시에서 교육이 언급된 둘째 경우도 역시 [[아킬레스]]에 대한 것이다. 이 부분은 지나가는 말로 아킬레스가 [[켄타우로스]]인 늙은 케이론<ref>cheiron, 고대 그리스에서 의술, 음악에 대한 권위자</ref>에게서 치료의 기술을 배웠다는 것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가정에서 감당할 수 없는 것 이상의 교육이 필요한 경우 그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의 제자로 들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보여준다. 이러한 경우의 교육은 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육이이루어졌다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보다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사적 관계에서 교육이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행해졌다는타당할 것이다.
 
[[헤시오도스]]의 문헌을 참고하면,문헌은 [[호머호메로스]]가 묘사한 시대 이전의 교육에 대해서도대한 살펴볼내용도 담고 있다. 헤시오도스의 작품에는 주술과 축귀의 의식, 야수 숭배, 거석 숭배, 귀신과 신인 동형의 신들, 인신공양 등의 내용이 나타나는데, 여기서이는 당시 사회에서 원시적 형태의 교육에교육이 대해이루어 졌음을 수 있다의미한다. 이 시기에는 어떠한 집단에 새로이 가입하는 사람은 그 가입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적절한 의식을 거쳐야 했는데, 이러한 의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인식]]'이었다’이었다. 헤시오도스의 작품에 나타난따르면, 성인식에 참가하기 위해 젊은이는 상당 기간 동안 가정을 떠나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다. 이 시기에 젊은이들은 여러 종류의 시련([[단식]], 채찍 맞기 등)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이와 같은 성인식을 하여통과하여 성인의 지위에 들면, 성인으로서 행해야 할 여러 역할들을 배웠다. 이 과정에서 부족의 전통과 관습, 금기와 혼례에 대한 사항 등을 배웠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이러한 [[성인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인간의 어떤 행동이나 혹은 특정한 어떤 사람이 부족 전체에 저주를 몰고 온다는올 수도 있다는 인식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성인들은 젊은이들에게 부족의 안전을 위한 올바른 행동을 가르치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인식은 이전에 교육받은 바를 평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물론 성인식에는 채찍으로 때리거나 단식 하는 것과 같은 교육적 의미와 무관해 보이는 육체적 고통도 들어 있었다. 미신적인 저주에 대한 공포가 차차점차 사라지고 문화가 발달하면서, 성인식의 방식이 변화하게 되었다. 관습의 요구에 따르는 무의미적인무의미한 맹목성을 극복하고 새태의세태의 변화와는 무관한 항구적인 진리를 가지는 도덕교육적인 측면으로 변화되어 갔던 것이다.
 
==스파르타의 교육==
[[File:Ancient sparta theater.jpg|thumb|right|250px|[[스파르타]] 유적]]
[[스파르타]]라는 국가의 독특성과 효율성의 기초가 되었던 교육체제는 기원전 9세기에 [[리쿠르고스 (스파르타)|리쿠르고스]]의 입법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통설에는 2중의 오류가 있음이 많은 교육사학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ref name="ssfdasadfjl">《서양교육사》, 윌리엄 보이드, 교육과학사, 2008년., 40페이지</ref>. 먼저, 리쿠르고스가 한 것이건 누가 한 것이건 간에 어떤 입법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여겨지는 스파르타식 생활의 특징은 당시 [[고대 그리스]] 세계의 공통적인 사항이었기현상이었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서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아니하다. 다만, 스파르타는 북으로는 험준한 산맥과 남으로는 해안을 마주하고 있어 다른 그리스 국가들에 비해 뒤처지고 잊혀진 채 오랜 기간 동안 이전의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있기는있었던 했다것이다. 둘째로, 역사시대에 들어 스파르타를 경직된 군사체제로 만든 급격한 입법상의 변화는 기원전 9세기에 시행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 7세기에 시행된 것이다<ref name="ssfdasadfjl"></ref>.
 
기원전 7세기 말경까지 [[스파르타]]인들은 [[고대 그리스|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도시국가]]들과 공동의 보조로함께 발전해 나가다가 어떤 이유에선지 갑자기 사회발전을 멈췄다. 스파르타가 있었던 지역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발견된 유물은 당시 예술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7세기 전까지의 스파르타인들은 우아한 것은 우아하게, 해학적인 것은 해학적이게 해석하는 전형적인 그리스적 미학감각을 보여주는 활기찬 예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 말을 기점으로 그러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신성한 물건에조차도 그들의 유머감각을 표현하던 기괴한 면모가 자취를 감추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는 [[고대 올림픽|올림픽]] 경기의 우승자 명단에서 스파르타인들이 이전 시기에 비해 소수만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러한 사실을 일정 정도 방증한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변화는 그들의 인구 구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스파르타에는 지배계급보다 농노와 거기에 오래전부터 거주하고 있던 원자유민들의 인구가 훨씬 많아서 권위적 지배를 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국토의 경작 가능한 부분을 여러 개의 할당지로 분할하고 그 각각을 국가 농노의 경작에 의해 한 사람의 중무장 보병[helot]과 그 농노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하여 사회적인 문제와 군사적인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스파르타의 지도자는 기존 귀족 체제에 입각하여 군인의 국가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국민의 생활방식 전체를 재조직하였다. [[리쿠르고스 (스파르타)|리쿠르고스]]건 아니건 이러한 생활방식의 재조직을 이룩한 사람은 상당한 지혜를 갖고 국가의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는 그것에 부합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스파르타의 전통에 맞는 올바른 교육과 훈련을 모든 시민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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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도시국가]]에서는 부모들이 각각의 자녀를 거의 자신의 의사에 따라 마음대로 교육해도 좋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에서는 국가가 정하는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질 수 없었으며, 국가로부터 토지를 할당받을 수도 없었다. 스파르타에서는 성인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아동의 생활도 모든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신생아는 태어난 지역의 장로들에게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만일 허약한 아이로 판정되면 저절로 죽도록 내버려 두거나 농노들에게 넘겨주었다. 이 검사에 합격한 신생아는 일곱 살까지는 가정에서 어머니의 손에 양육되다가 그 이후에는 가정의 통제에서 지역사회와 국가의 통제로 이관되었다.
 
7~8살까지는 남성 아동들은 점차 단계가 높아지는 여러 단계의 훈련을 받는다. 이러한 훈련을 거쳐 18세가 되면, '에페보스(ephebos; 사관후보생)'가 되며 이때부터 허드렛일과 같은 사소한 훈육에서 벗어나게 된다. 에페보스는 지방 각지로 파견되어 비밀리에 농노들의 동정을 살피는 임무를 수행하며 변방 수비 임무를 띠고 군인으로 복무하는 일을 한다. 이러한 시보훈련은 20세가20세까이 되면 끝난다이루어진다. 시보훈련을 마치면, 성인으로서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지만, 시민으로서의 완전한 권리를 누리려면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시민권을 획득한 후에도 끊임없이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며, 늙어서 그 능력이 없어질 때까지 항상 전장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스파르타]]의 교육의 전반적 성격을 결정한 것은 군사적 효율성에 대한 것이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동과 성인의 일상생활은 모두 군대의 병영생활과 조금도 다름없이 엄격하였다. 남자 아동들은 사시사철 맨발로 다녔으며 홑옷을 입었다. 한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처럼 음식은 거칠고 침대는 딱딱하였다. 매일매일 스파르타인들은 수영이나 사냥과 같은 운동과 야외 활동으로 여념이 없었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스파르타인들은 끊임없는 감독 하에 있었다. 7세가 되어 어머니 곁을 떠나면 남자 아동은 그 아버지들이 전쟁에 대비하여 조직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역별로 '도(徒)', '제대(梯隊)'에 소속되어 층층이 계급별로 조직된 장교들 밑에서 지독하게대단히 엄한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제대(梯隊) 내에서 가장 용감하고 재주 있는 청소년은 제대장으로 임명되어 일종의 준사관으로 일을 하였다. 제대에서의 훈련은 '에이렌(Eiren)<ref>훈련 과정을 이수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사람</ref>'의 지도아래 이루어졌다. 에이렌 위에는 '파이도노모스(paidonomus)'라는 국가의 관료가 있어서, 여러 부관들의 보위를 받으며 부대를 지휘하였다. 이들 직업적 군인 이외에도 모든 성인시민은 누구나 아동들이 하는 일을 예리하게 지켜보면서 정규 훈련관을 대신하여 아이들을 관리감독하였다관리ㆍ감독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의 교육은 전반적으로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거기에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면에서 재치 있고 영리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가르치는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 예를 들어, 에이렌(Eiren)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아동들을 밖으로 보내어 저녁거리에 사용할 장작과 채소를 훔쳐오게 하였다. [[플루타르코스]]는 「[[리쿠르고스 (스파르타)|리쿠르고스]] 장」에서 '그들은‘그들은 약초 항아이를항아리를 보면 정원에 몰래 숨어들어 가든지 공동취사장에 살금살금 기어들어 가든지, 하여간 어디서든지 훔쳐 내온다. 그러나 들키기만 하면 누구든지 부주의하거나 멍청하다고 하여 사정없이 매를 맞는다. 또한 양식거리가 될만한될 만한 것이 있으면, 주인이 잠을 자거나 한눈팔 때를 기다려 훔쳐 내온다.'라고’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아동들에게 신속신속하고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했던 것이었다. 또,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저술에서, 에이렌이 아동에게 질문을 하고 요령있는 대답을 하는 것을 가르쳤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군(軍) 조직에서 웅변교육과 문학교육이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스파르타]]의 교육은 재치있고 민첩한 인간을 길러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안목이 좁은 시민을 길러내었다. [[이소크라테스]]의 저술에 의하면, 보통의 스파르타 인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스파르타 인들은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글 읽는 것을 배웠다는 [[플루타르코스]]의 저술에 의하면, 이소크라테스의 그 말은 사실과 다르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이 어떠하건, 글 읽는 것을 스파르타인들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는것않았다는 것, 그리고 국가에서 시행하는 교육에교육에서 글 읽는 것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조에서 문학과 예술이 스파르타의 교육체제에서 아무런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이에 대해 [[소피스트]]인 [[히피아스 (소피스트)|히파아스]]는 '스파르타인들이‘스파르타인들이 배우려고 하는 것은 위인과 영웅의 족보, 도시의 건설, 고대 유물뿐'이라고유물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스파르타]]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여성에 대한 교육이었다.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도시국가]]에서 여성은 가정의 울타리에서 외부 세계와 격리되어 자랐으며 가사에 관계되는 것 이외에는 교육을 받을 수도, 교육을 받지도 않았다. 스파르타인들은 교육을 실용적인 목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여성들이 집 밖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도록 했고, 용감하고 의지 굳은 남자 아이의 어머니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남자와 거의 다름 없는다름없는 훈련을 받았다. 여성 아동들은 그들 전용의 운동장에서 남성 아동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뛰고 달리고 공놀이를 하고 원반을 던지고 씨름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배웠다. 남성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제대에 소속되지 않고, 운동이 조금 덜 격렬했다는 것이다.
 
==아테네의 교육==
[[파일:Solon.jpg|thumb|right|190px|[[아테네]] 교육의 기초를 마련한 [[솔론]]]]
[[고대 아테네|아테네]]의 교육은 곧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스파르타]]와 [[크레타]]를 제외한 전지역에서전 지역에서 행해진 교육을 의미하는 것일만큼것 일만큼, 당시에 보편적인 교육이었다. 사실상, 아테네의 교육은 진보적인 그리스 교육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인 것이다. 또한, 가장 직접적이고 완전한 자료를 입수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아테네]]의 교육의 기원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널리 알려진 바로는 [[솔론]]이 교육에 대한 최초의 입법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솔론은 모든 남자 아이가 수영과 읽기를 배우도록 법으로 정하였고, 학교와 체육학교[palaistra; 레슬링 도장]의 운영에 대한 여러 규정을 제정하여 특별히 임명된 관리로 하여금 그것을 시행하도록 했다. 이러한 규정은 스파르타의 교육체제의 확립과 거의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사실은 교육문제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차이점이 아주 오래전에 기인된 것임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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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의 교육입법자와 달리 [[솔론]]은 그 당시 학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교과나 그 당시의 교육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하지 않았고, 다만 학생의 연령과 등급, 파이다고고스(paidagōgos)<ref>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동 보호자' 또는 '아이를 이끄는 자'이다. 아이가 성년(18세)가 될 때까지 아이의 등하교 길을 따라다니고, 학교에 있는 동안 지켜보아 주는 등, 아이의 바깥나들이에 따라다니는 노예를 의미한다. 즉 부모나 선생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 대신 아이를 돌보아 주거나 감독하는 가노(家奴)를 이른다.</ref>의 자질, 등하교 시간, 학교 구역 내 성인의 출입금지 등을 법률로 제정하였다. 이는 대체로 학생들에 대한 도덕적 영향을 염두에 둔 것들이다.
 
[[솔론]]이 제정한 그러한 법률이 있었다는 것은 곧 당시 [[아테네]]에 '학교'가‘학교’가 존재했음을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아테네의 학교가 [[바빌로니아]]의 학교를 본뜬 것인지 아니면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ref>《서양교육사》, 윌리엄 보이드, 교육과학사, 2008., 47페이지.</ref>. 기원전 8세기 경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도시국가]]들이 [[문명]]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할 때 이미 아테네에서는 [[페니키아]]의 [[표음문자]]를 본따 만든 [[그리스 문자]]를 사용하였고, [[호머]]의 서사시와 같은 수준 높은 문학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당시 ‘말과 행동이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했던 그런 단계는 분명히 지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이런 [[아테네]]에서는아테네에서는 문자생활이일상생활에서 이미문자 삶의생활이 필수적중요한 요소로위치를 차지하고 그런 상태였으며있었으며, 이는이러한 학교의환경에서는 설립이학교가 이루어지게필요한 하였다상황이었다. 여러 정황들로 볼때볼 때, 적어도 기원전 7세기 초에는 아테네에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학교는 국가가 세운것이세운 아니라것이 개인의아니라 영위로개인이 나타난설립한 사립학교였던 것 같다.
 
===구교육===
[[아테네]]의 교육 중 구교육은‘구교육’은 기원전 6세기로부터 기원전 5세기 중엽, 그리스 전체에서 아테네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까지 이뤄진 교육이다.
 
이 시기에 [[아테네]]의 교육과 [[스파르타]]의 교육 간의 차이는 계속 커져갔다. 하지만 두 경우를 모두 교육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최소한 한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즉, 두 국가에서의 교육은 모두 실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아동들에게 국가의 일원으로서 성인 활동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데에 직접적인 목적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생활방식이 달랐던 만큼, 두 국가에서의 교육에서도 그와 동일한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타의 소년은 '군인 시민'이 되도록 훈련된 반면에, 아테네의 소년은 전쟁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평화를평화 시를 위해서도 훈련 받았다. 그리하여 스파르타의 교육에서는 특정한 형태의 체육이 으뜸가는 관심사였음에 비하여, 아테네의 학교에서는 체육과 함께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음악<ref>그리스에서의 음악은음악 음악에교과는 시와음악, 시, 운율을 포함하고포함하는 있다과목이었다.</ref>을 교육했으며, 체육마저도 아테네의 정교한 심미적 감각에 맞게 수정되어 교육되었다.
 
구교육 시기에는 체육이 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사실, 이 시기에 국가 당국이 교육에 관심을 갖는 부분은 체육 분야가 유일했다. 소년들은 훈련을 받기 위해 ‘사설 체육학교[palaistra; 레슬링 도장]’에 다녔다. 소년기를 갓 벗어난 청년들은‘아카데메이아청년들은 ‘아카데메이아(Akademeia)’나 ‘퀴노사르게스(Cynosarges)’라는 두 개의 공립 체육학교[귐나시온; gymnasium] 중 하나에 다녔다.
 
체육학교[palaistra]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7~8세)은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 단계이고, 신체적 조건이 보통의 운동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자세와 가벼운 신체적 동작을 배우면서 공놀이와 같은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할만한 여러 놀이를 학교에서 배웠다. 본격적인 체육훈련은 그 효과가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12~13세부터 시작되었다. 이 나이의 소년들은 높이뛰기, 달리기, 씨름, 창 던지기, 원반 던지기 등으로 된 ‘오종경기(Penthalon)’의 기술을 습득하기 시작했고 또 아마 체육관 바깥에서 그리스 민족의 전통 무용을 배울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전쟁에 적합한 몸을 갖춤은 물론, 우아하고 잘 발달된 몸매를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