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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형이 [[손책]](孫策)의 중신 등당이었으므로, 젊은 나이로 [[손책]]을 섬기게 되었다. 등당이 죽은 후, [[장소 (동오)|장소]]의 추거로 등당을 대신하였고 별부사마에 제수되었다. 200년, 손책이 죽은 후 그 동생인 [[손권]](孫權)역시 섬겼다. 여몽은 용장으로서 그 무용으로 [[손권]]에게 수많은 공훈을 세웠으며, [[황조]](黃祖)와의 전투에서는 적의 도독인 [[진취 (후한)|진취]](陳就)를 직접 베었다. 그리고 208년 [[적벽]](赤壁)의 전투와 강릉(江陵)의 전투에서도 공훈을 세워 편장군 심양현령으로 임명되었다.
 
여몽은 [[황조]](黃祖) 토벌을 시작으로 적벽(赤壁)의 싸움, 그 후의 [[주유]](周瑜)의 형주(荊州)를 어우르는 일련의 싸움에서 대장을 맡아 전공을 올리는 활약을 했으나, 교양적인 면모는 전혀 갖추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주군인 [[손권]]에게서 교양의 중요성을 훈계받은 후에 학문에 길을 세웠다. 강표전(江表傳)에 의하면, [[손권]]으로부터 “특별히 박사가 될 필요까지는 없고, 그저 과거의 일을 많이 알고 있었으면 한다.”라고 들었다고 하나, 여몽은 결국 유학자로서 성공할 정도로 많은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그 후, 죽은 주유를 대신하여 육구에 주둔하게 된 [[노숙]](魯肅)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을 때, 면학에 심취해있던 여몽은 무엇이든 막힘 없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노숙]](魯粛)은 여몽을 ‘오군의 아몽에 비할 수 없다’ (아몽은 어릴적의 여몽을 부르는 말, 옛날 오군에 있을 시절의 여몽을 일컬은 것)라고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여몽은 ‘사‘선비(士)는 3일만 떨어져 있어도 주목하며 상대하게 된다.’고 말했다 (매일매일 공부하는 자는 삼일만 만나지 않아도 크게 변화하여 있다라는 의미로, 상대를 볼때 선입관에 빠져서 대하지 말고,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보라하는 의미).
 
[[손권]]은 성인이며 학문에 심취한 장군으로서 여몽과 [[장흠]](蔣欽)을 들었다. 또한, 진보가 없는 인물을 ‘오의 아몽’이라 하는 것은 여몽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노숙이 죽자 육구에 주둔하였고 노숙이 거느리던 군대 1만을 물려받았다. 여몽은 대국인 위(魏)나라를 공격하여도 효과가 적을것을 염두에 두어, 촉(蜀)이 점거하고 있는 형주(荊州) 남부의 전역을 삼킨 후, 그곳을 발판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19년, 형주를 지키고 있는 촉의 명장 [[관우]](關羽)와 대항하던 중 병에 걸리게 된다. 후임으로써 명장 [[육손]](陸遜)을 임명하였다. 촉의 남군태수 [[미방]](麋芳)이 손권 측과 내통을 약속하여 진격, [[관우]]의 퇴로를 끊어버리고, 12월 겨울에 당양현(當陽縣)의 남쪽에 있는 장향(障鄕)에서 [[관우]]를 포획, 임저(臨沮)에서 그의 아들 [[관평]](關平)과 함께 처형했다. 이로써, 여몽은 [[관우]]를 쓰러뜨리고 형주를 되찾은 큰 공훈을 얻었다.
 
그러나 이전부터 병이 낫지 않았던 여몽은 결국 사망하게 된다. 향년 42세였다. 아들 여패(呂覇)가 작위를 이었으며, 여패가 죽고 그의 형 여종(呂琮)이 작위를 이었다. 여종이 죽은 후, 여종의 동생 여목(呂睦)이 작위를 이었다. 일설에는 일본군이 중국 난징 인근을 점령하면서, 삼국연의 에서삼국연의에서 관우를 매우 존경하고 흠모했던 한 일본군 장교의 명으로 여몽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부관참시되었으며 이어 완전히 폭파되었다는 전설이말이 있다전해진다.
 
[[진수 (서진)|진수]]는 여몽을 평가하면서 용맹하면서도 지략에 능하였으니, 무장으로써 그만한 인물은 없었다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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