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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류베이, 劉備, <small>, [[161년]] [[6월 7일]] ~ [[223년]] [[4월 24일]])는 [[삼국 시대 (중국)|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221년]] [[4월 6일]] ~ [[223년]] [[4월 24일]])로, [[자 (이름)|자]]는 '''현덕'''(玄德), [[시호]]는 '''소열제'''(昭烈帝)이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위 (삼국)|조위]](曹魏)가 '''[[한나라|한]]'''(漢)을 계승한 정통 황조라고 보았으므로 유비를 황제로서 칭하지 않고 '''[[촉한]]'''(蜀漢) '''선주'''(先主)라고 부른다. [[진서]](晉書) 열전에서 유비의 묘호를 '''열조'''(烈祖)라고 칭한 바가 있으나 이것은 그의 정식 [[묘호]]가 아닌, 후세사가들이 추봉한 묘호이다. 황건적 평정 이후 한창 세력이 상승할 때는 '''유예주'''(劉豫州), '''유좌장군'''(劉左將軍), '''의성정후'''(宜城亭侯)라고도 불리었다.
 
[[전한]](前漢) [[전한 경제|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지]]의 흔한 군웅들과 달리 뚜렷한 기반이 없이 출발했으나 [[한 고조]]의 풍도를 가지고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 (촉한)|마초]](馬超), [[황충]](黃忠), [[조운 (촉한)|조운]](趙雲), [[위연]](魏延), [[제갈량]](諸葛亮), [[방통]](龐統), [[법정 (후한)|법정]](法正), [[마량]](馬良) 등의 걸출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차례대로 등용하여 당대 중원의 패자였던 '''[[위 (삼국)|위]]'''(魏) '''무제'''(武帝) '''[[조조]]'''(曹操)와 끝까지 맞서 싸워 [[촉한]](蜀漢)을 건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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