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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구려-당 전쟁]]을 통해 국가가 어수선하자, 가족들과 부하들을 데리고 당나라로 건너가 투항하였다.
 
이후 고질은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며 많은 공을 세웠으며 요동 마미성에서 거란과의 전투를 하게 되었으나 고구려 부녀 세 사람과 성과 해자를 굳게 지키면서 적과 힘겹게 싸웠으나 구원병은 이르지 않았다. 성은 고립되고 땅은 끊어졌으며, 병사는 다하고 화살은 소진되었다. 밤낮으로 적이 포위공격을 하니 병졸들이 따라서 함락되어 죽게 되었다. 포로가 되었으나 말과 형색은 늠름했다. 적의 흉악함과 위엄에 굴하지 않아 마침내 도륙을 당하게 되어 당나라 만세 통천 2년(697) 5월23일 마미성(磨米城)에서 아들 고자와고자(高慈)와 함께 죽으니 나이 72세였다.
 
성력 3년(700) 12월17일에 낙주(洛州) 합궁현(合宮縣) 평미향(平樂鄕) 언덕에 묻었다.…(묘지명은) 조의대부(朝議大夫)이자 행봉각사인(行鳳閣舍人)인 위승경(韋承慶)이 찬(撰)하고, 전우감문위장상(前右監門衛長上) 홍농(弘農) 유종일(劉從一)이 글씨를 썼다. 의주(宜州) 미원현(美原縣) 사람인 요처괴(姚處괴<壞에서 土 대신 王>)와 상지종(常智琮)과 유랑인(劉郞仁) 세 사람이 함께 묘비명을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