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트 왕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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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루의 동생인 기야투(Ghiyathu'd-Din)가 말리크 위에 올랐다. 그는 즉시 다른 동생인 알라우(Ala'u'd-Din)와 왕위 다툼을 벌이다가 일칸 [[울제이투]]에게 이 문제를 가져갔다. [[울제이투]]는 그를 성대하게 환영했다. 기야투는 1307~8년 사이 호라산으로 돌아왔으나 끊이지 않는 다툼으로 다시 일칸을 만나러 1314~5년 사이 길을 떠났다. 헤라트에 다시 돌아왔을 때 왕조의 영토는 [[차가타이 칸국]]에 의해 공격받고 있었다. [[시스탄]]에서도 반기를 들었다. 차가타이의 왕자인 야수르는 [[헤라트]]를 공격했지만 [[일 칸국]]의 군대에 가로막혀 실패했다. 1320년 8월 기야투는 왕자인 샴수드에게 국정을 맡기고 [[메카]]로 순례를 떠났다.
 
1327년 [[추판 왕조]]의 군주가 [[일 칸국]]의 [[아부 사이드 (티무르 왕조)|아부 사이드]]를 배신하고 헤라트로 망명했다. 그는 친구였던 기야투에게 몸을 숨겨달라고 부탁했고 기야투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아부 사이드 (티무르 왕조)|아부 사이드]]는 그를 처형하라고 압박했고 기야투는 거기에 따랐다. 기야투도 2년 후 사망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넷(샴수드, 하피즈, 무이즈, 바키르) 있었는데 샴수드는 그의 뒤를 이었지만 곧 세상을 떴다. 하피즈는 학자였으나 왕위를 물려받았다. 하피즈는 2년 후 시해당하고 왕위는 무이즈에게 넘어갔다.
 
 
==1331년~1370년==
 
무이즈(Mu'izzu'd-Din Husain) 즉위 4년 후 일칸 [[아부 사이드 (티무르 왕조)|아부 사이드]]가 죽자 [[일 칸국]]은 급속하게 해체되었다. 무이즈는 [[토가 테무르]]와 동맹을 맺고 자신이 [[일 칸국]]의 칸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에게 공물을 바쳤다. 무이즈의 골칫거리는 토가 테무르의 적인 사르바다르인이었다. 카르트 왕조는 자바 전투에서 이들과 맞닥뜨렸다. 1342년 7월 18일 벌어진 이 전투에서 사르바다르의 군대는 통일성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카르트 왕조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무이즈의 군대는 북서쪽의 [[차가타이 칸국]]에 맞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시기에 그는 아직 어린 나이였던 [[티무르]]를 밑에 두었다. 1349년 그는 [[토가 테무르]]에게 보내는 공물을 끊고 자신이 [[술탄]]으로서 단독으로 통치한다고 선언했다. [[토가 테무르]]는 사르바다르인에게 1353년 살해당하여 카르트 왕조에 더이상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1358년 쯤 차가타이의 카자간이 호라산으로 침입하여 [[헤라트]]를 포위했다. 차가타이 군대는 카자간의 암살로 인해 후퇴했고 무이즈의 지배는 재건되었다.
 
사르바다르인은 1362년 쳐들어왔지만 다시금 내부 문제로 무이즈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얼마 후 사르바다르의 알리-이 무야드(Ali-yi Mu'ayyad)로부터 시아 파 데르비쉬(Dervish)들이 카르트 왕조로 망명해 왔다. 이 동안 티무르와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카르트 왕조가 그의 영역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무이즈가 1370년에 죽자 사라크와 쿠히스탄의 일부를 제외한 영역은 기야스가 계승했다. 두 지역은 그의 배다른 형 무함마드가 획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