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트 왕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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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년~1383년, 멸망==
 
기야스(Ghiyas al-Din)는 [[토가 테무르]]의 손자로 그의 어머니는 카툰 술탄이었다. 그는 데르비쉬 망명자들로 하여금 사르바다르의 내부를 혼란스럽게 하는 계책을 썼다. 이에 대항하여 사르바다르의 알리-이 무야드는 무함마드와 결탁했다. 기야스가 무함마드를 제거하려 할 때 알리-이 무야드는 병력을 동원해 방어했다. 그런데 사르바다르는 내부 갈등으로 주도권을 쥐는 데 실패했고실패하여 더 이상 이 사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이를 틈타 기야스는 [[니샤푸르]]를 차지했다. 그 사이 기야스와 무함마드는 각자 [[티무르]]에게 도움을 청했고 기야스는 대사를 파견한 반면 무함마드는 사라크에서 쫓겨나 직접 티무르 앞에 피난처를 제공받기 위하여 나타났다. 티무르는 기야스 편을 들어 그의 조카 세이니 쿠틀룩 아가와 기야스의 아들 피르 무함마드를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이 결혼식은 1376년 사마르칸트에서 거행되었다치러졌다.
 
훗날 [[티무르]]는 무함마드를 항복시키기 위한 회합에 기야스를 초청했으나 카르트 왕조는 무함마드를 처형함으로써 이 사건을 독자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티무르는기야스를 괘씸하게 여긴 [[티무르]]는 원정을 결심했다. [[티무르]]는 카르트의 고관 무인 알-딘 자미와 얌의 군주 및 주요 인사들을인사들로부터 포함,지지 호라산의의사를 밝힌 편지들을 받고 호라산인의 지지를 확신했다. 1381년 4월 [[티무르]]는 도시도성 앞에 나타났다. 도시민들은 이미 카르트 주군에 대한 충성 따위는 잊고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은 [[티무르]]가 살려주기로 한 약속만 믿고 있었다. 이윽고 도시는 무너졌고 방어 시설은시설들은 소용이아무 쓸모가 없었다. [[울라마]]와 학자들은 [[티무르 왕조]]의 고향으로땅으로 이주했다. 막대한 공물이 바쳐졌고 기야스와 그의 아들은 [[사마르칸트]]로 압송되었다.
 
기야스는 [[티무르]]의 신하가 되었으나 1383년 [[헤라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기야스는 [[티무르]]의 아들 [[미란 샤]]에게 진압되고 그와 가족들은 처형되었다. 같은 해 일어난 또다른 반란도 [[미란 샤]]가 진압했다. 카르트 왕조의 남은 인사들은 [[미란 샤]]가 베푼 연회에서 살해당했다. 카르트 왕조는[[티무르]]가 감행한 [[페르시아]] 원정의 첫 희생양이 되었다.
 
기야스는 [[티무르]]의 신하가 되었으나 1383년 [[헤라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기야스는 [[티무르]]의 아들 [[미란 샤]]에게 진압되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처형되었다. 같은 해 일어난 또다른 반란도 [[미란 샤]]가 진압했다. 카르트 왕조의피바람 속에서 살아 남은 인사들은카르트 왕조의 인사들마저 [[미란 샤]]가 베푼 연회에서 살해당했다. 이렇게 해서 카르트 왕조는[[티무르]]가 감행한 [[페르시아]] 원정의 첫 희생양이 되었다.
 
==카르트 왕조의 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