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칠중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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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이름=칠중성<br/>七重城 |
지정_번호=제437호437 |
소재지=[[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산148 외 |
제작_시기=[[신라]] [[선덕여왕]] |
비고지정연월일=[[2002년]] [[1월 29일]] 지정
}}
 
'''칠중성'''(七重城)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에 위치한 산성(山城)으로, [[2002년]] [[1월 29일]]에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437호로 지정되었다.
[[1월 29일]]에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437호로 지정되었다.
 
[[진흥왕]] 대에 [[신라]]영토가 된 이래 [[선덕여왕]] 때에 북방 변경의 요충지인 [[칠중현]]에 축조된 성으로 [[신라의 삼국 통일|삼국 통일]]~[[나당 전쟁]]시기에 격전지였다.
성으로 [[신라의 삼국 통일|삼국 통일]]~[[나당 전쟁]]시기에 격전지였다.
 
첫 번째로 [[638년]] [[선덕여왕]]7년에 [[고구려]]군이 대대적으로 칠중성을 공격했지만 [[알천]]에 의해 격퇴되었던 것을 비롯하여,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던 [[660년]]에 [[고구려]], [[말갈]]연합군이 칠중성을 공격해 20여일간의 포위전 끝에 [[현령]](縣令)필부와 [[상간]](上干) 본숙(本宿), 모지(謨支) 미재(美齋)등의 관리를 비롯하여 일반 백성들이 전사하는 등의 대패를 당하고 칠중성이 함락당하였다.
격퇴되었던 것을 비롯하여,
 
다시 [[나당전쟁]]때인 [[673년]][[문무왕]]13년에는 [[고구려]]군이 [[이근행]]의 [[당나라]]군대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해 [[고구려 부흥운동]]이 결정적으로 와해되었고 고구려군은 신라군에 흡수되어 나중에 [[9서당]] [[10정]]에 편입되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던 [[660년]]에 [[고구려]], [[말갈]]연합군이 칠중성을 공격해 20여일간의 포위전 끝에 [[현령]](縣令)필부와 [[상간]](上干) 본숙(本宿), 모지(謨支) 미재(美齋)등의 관리를 비롯하여 일반 백성들이 전사하는 등의 대패를 당하고 칠중성이 함락당하였다.
 
그러나 2년뒤인2년 뒤인 [[675년]] [[문무왕]]15년에 [[당나라]]가 다시 [[말갈]]과 연합해 칠중성을 공격했고 신라군은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당군을 격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나중에 [[매소성 전투]]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시 [[나당전쟁]]때인 [[673년]][[문무왕]]13년에는 [[고구려]]군이 [[이근행]]의 [[당나라]]군대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해 [[고구려 부흥운동]]이 결정적으로 와해되었고 고구려군은 신라군에 흡수되어 나중에 [[9서당]] [[10정]]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2년뒤인 [[675년]] [[문무왕]]15년에 [[당나라]]가 다시 [[말갈]]과 연합해 칠중성을 공격했고 신라군은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당군을 격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나중에 [[매소성 전투]]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칠중성 일대는 한국사에 주요 전장으로 기록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에는 [[6월 25일]] ~ [[6월 28일]]사이에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한국군이 속수무책으로 궤멸당한 [[고랑포 전투]]가 있었고 이듬해 [[1951년]] 4월 후순의 [[적성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주축이 된 제29보병여단이 3만명의 [[중공군]]의 도강을 저지하기도 했었다.
속수무책으로 궤멸당한 [[고랑포 전투]]가 있었고 이듬해 [[1951년]] 4월 후순의 [[적성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주축이 된 제29보병여단이 3만명의 [[중공군]]의 도강을 저지하기도 했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