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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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규]](陳珪)의 아들로, 처음에는 서주자사(徐州刺史) [[도겸]](陶謙)을 섬겼다.
 
사려깊고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25세(189년)에25세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동양장(東陽長)이 되었다. 그 후 전농교위(典農校尉)에 임명되었는데, 진등은 토지에 따라 어떤 작물을 심기에 알맞는지 살펴 수로를 파고 관개시설을 정비하여 큰 수확을 얻었다.
 
도겸 사후에는 [[유비]](劉備)를 섬겼고, 훗날 [[여포]](呂布)가 서주를 차지하자 그를 섬겼다. 그러나 진규와 진등은 여포를 싫어하였고, 진등은 [[조조]](曹操)에게 사자로 갈 때 조조에게 여포를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진등의 말을 들은 조조는 진등을 광릉태수(廣陵太守)에 임명하였다. 진등의 통치로 광릉은 안정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