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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신이전 12:372021년 3월 12일 (금) 12:37원풍 김년오 토론 기여 2,611 바이트 +11 , 노인이 된 양칠성의 민간 동료들과 부하들, 국방성 장차관 등 내외 귀빈들이 사열대에 도열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의장대 사열 축포 등의 행사를 마치고 묘비 교체하고 제막식을 별도로 하였다. 참고로. 이날 촬영한 비디오 동영상, 스냅사진은 김년오가 현재도 소장을 하고 있어 언제고 자료로 제출을 할 수 있다. 아울러 초기 알리미 권태하 김광수전국회의원, 전주 여동생, 인도네시아의 아들도 사진을 소장하고 있다, 후 귀국하여 청와대 박세일정책수석에게 보고를 하고 “양칠성국적이름찿아주기” 모임을 해체하였다. 단순히 시민단체라는 모호한 내용의 사실을 밝힌다. 편집 취소 태그: 시각 편집
  • 최신이전 12:352021년 3월 12일 (금) 12:35원풍 김년오 토론 기여 2,600 바이트 +10 1995년 양칠성국적이름찿아주기 모임은 동대문구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권태하에 의해 알려졌고, 당시 서울시의원이었던 김태웅을 중심으로, 김년오의 주도 하에 이뤄졌다. 김년오는 1995년 광복절을 기해 청와대 박세일정책수석에게 상의를 하고 한국 국방부와 인도네시아 국방성에 “양칠성이 한국 사람이며 독립영웅묘지에 일본이름, 일본인으로 되어있는 것을 정정해 달라”는 문서를 보냈다. 의외로 놀라운 일은 인도네시아 국방성에서 청와대로 초청장과 ㅇㅘ달라는 답신이 왔다는 통보를 박세일 수석으로부터 받았다. 이에 김년오가 묘비석 디자인을 하고 박세일수석에게 당시 2천만원을 지원받아 망우리에서 화강암 석비를 주문 제작하엿고, 12명 항공료와 체류비용을 하여 당시 전주에 살고 있는 양칠성의 여동생, 김광수국회의원을 대동하고, 김태웅 권태하 김년오 등 12인이 인도네시아를 방문케 되었다. 이튿날 쟈카르타호텔에서 국방부 헌병의 에스코트로 반둥 독립영웅묘지에 도착하니. 양칠성의 성장한 아들과 며느리 편집 취소 태그: 한글 자모가 포함된 편집 요약 시각 편집
  • 최신이전 12:332021년 3월 12일 (금) 12:33원풍 김년오 토론 기여 2,590 바이트 +2 1995년 양칠성국적이름찿아주기 모임은 동대문구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권태하에 의해 알려졌고, 당시 서울시의원이었던 김태웅을 중심으로, 김년오의 주도 하에 이뤄졌다. 김년오는 1995년 광복절을 기해 청와대 박세일정책수석에게 상의를 하고 한국 국방부와 인도네시아 국방성에 “양칠성이 한국 사람이며 독립영웅묘지에 일본이름, 일본인으로 되어있는 것을 정정해 달라”는 문서를 보냈다. 의외로 놀라운 일은 인도네시아 국방성에서 청와대로 초청장과 ㅇㅘ달라는 답신이 왔다는 통보를 박세일 수석으로부터 받았다. 이에 김년오가 묘비석 디자인을 하고 박세일수석에게 당시 2천만원을 지원받아 망우리에서 화강암 석비를 주문 제작하엿고, 12명 항공료와 체류비용을 하여 당시 전주에 살고 있는 양칠성의 여동생, 김광수국회의원을 대동하고, 김태웅 권태하 김년오 등 12인이 인도네시아를 방문케 되었다. 이튿날 쟈카르타호텔에서 국방부 헌병의 에스코트로 반둥 독립영웅묘지에 도착하니. 양칠성의 성장한 아들과 며느리 편집 취소 태그: 한글 자모가 포함된 편집 요약 시각 편집
  • 최신이전 12:322021년 3월 12일 (금) 12:32원풍 김년오 토론 기여 2,588 바이트 −6 노인이 된 양칠성의 민간 동료들과 부하들, 국방성 장차관 등 내외 귀빈들이 사열대에 도열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의장대 사열 축포 등의 행사를 마치고 묘비 교체하고 제막식을 별도로 하였다. 참고로. 이날 촬영한 비디오 동영상, 스냅사진은 김년오가 현재도 소장을 하고 있어 언제고 자료로 제출을 할 수 있다. 아울러 초기 알리미 권태하 김광수전국회의원, 전주 여동생, 인도네시아의 아들도 사진을 소장하고 있다, 후 귀국하여 청와대 박세일정책수석에게 보고를 하고 “양칠성국적이름찿아주기” 모임을 해체하였다. 단순히 시민단체라는 모호한 내용의 사실을 밝힌다. 편집 취소 태그: 시각 편집
  • 최신이전 12:312021년 3월 12일 (금) 12:31원풍 김년오 토론 기여 2,594 바이트 +14 노인이 된 양칠성의 민간 동료들과 부하들, 국방성 장차관 등 내외 귀빈들이 사열대에 도열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의장대 사열 축포 등의 행사를 마치고 묘비 교체하고 제막식을 별도로 하였다. 참고로. 이날 촬영한 비디오 동영상, 스냅사진은 김년오가 현재도 소장을 하고 있어 언제고 자료로 제출을 할 수 있다. 아울러 초기 알리미 권태하 김광수전국회의원, 전주 여동생, 인도네시아의 아들도 사진을 소장하고 있다, 후 귀국하여 청와대 박세일정책수석에게 보고를 하고 “양칠성국적이름찿아주기” 모임을 해체하였다. 단순히 시민단체라는 모호한 내용의 사실을 밝힌다. 편집 취소 태그: 시각 편집
  • 최신이전 12:302021년 3월 12일 (금) 12:30원풍 김년오 토론 기여 2,580 바이트 −2 1995년 양칠성국적이름찿아주기 모임은 동대문구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권태하에 의해 알려졌고, 당시 서울시의원이었던 김태웅을 중심으로, 김년오의 주도 하에 이뤄졌다. 김년오는 1995년 광복절을 기해 청와대 박세일정책수석에게 상의를 하고 한국 국방부와 인도네시아 국방성에 “양칠성이 한국 사람이며 독립영웅묘지에 일본이름, 일본인으로 되어있는 것을 정정해 달라”는 문서를 보냈다. 의외로 놀라운 일은 인도네시아 국방성에서 청와대로 초청장과 ㅇㅘ달라는 답신이 왔다는 통보를 박세일 수석으로부터 받았다. 이에 김년오가 묘비석 디자인을 하고 박세일수석에게 당시 2천만원을 지원받아 망우리에서 화강암 석비를 주문 제작하엿고, 12명 항공료와 체류비용을 하여 당시 전주에 살고 있는 양칠성의 여동생, 김광수국회의원을 대동하고, 김태웅 권태하 김년오 등 12인이 인도네시아를 방문케 되었다. 이튿날 쟈카르타호텔에서 국방부 헌병의 에스코트로 반둥 독립영웅묘지에 도착하니. 양칠성의 성장한 아들과 며느리, 편집 취소 태그: 한글 자모가 포함된 편집 요약 시각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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