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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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612년]] [[2월 5일]]([[음력 1월 4일]])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경궁]] 환경당에서 돌연사(독살 추정)환경당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645|5|21|1612|2|5}}
|능묘 = [[경기도]] [[고양시|고양]] 서삼릉 소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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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인렬왕후]]
|친인척 = [[강석기]](장인)
}}{{출처 필요|독자적 표현}}
}}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년]] [[2월 5일]]([[음력 1월 4일]]) ~ [[1645년]] [[5월 21일]]([[음력 4월 26일]]))는 [[조선]]의 [[왕세자]]이며 [[조선 인조|인조]]와 [[인렬왕후|인렬왕후인열왕후 한씨]]의 적장자이다장남이다.
 
== 이력 ==
그의 본명은 '''이왕'''(李汪)이고,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며 [[조선 효종|효종]](봉림대군)의 친형이다. 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 강씨]]이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의 한사람으로볼모로 잡혀갔으며 [[베이징]]에서 만난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 등과만나 서구 문명을 접하고는접하게 되었다. 반청 노선보다 대청 실용주의로 전환하였다. [[1644년]] [[11월]]에 석방되어 3개월만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반청 사상을 고수하던 아버지 인조와 갈등하던 중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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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인질 생활 ===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설치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 태종|숭덕제]]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항복의 예를 올리며 항복하자(1637년), [[정축하성]] 이후 [[청나라]]와의 조청화약(朝淸和約)이 체결되었으며 청나라에서 인질을 요구하자 그는 [[1637년]] [[4월 10일]] 자진해서 부인 강씨와 [[조선 효종|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 수도 심양([[선양 시|선양]])으로 가서 심양관에 억류되었다.
 
[[조선 인조|인조]]는 처음 [[이기축]]을 그를 배종하는 무관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1637년]] [[3월 4일]] 소현세자는 [[좌부승지]] [[한흥일]]을 시켜 '무재(武宰)의 직임은 일행을 검칙하는 것인데 이기축(李起築)은 서얼이기 때문에 호령을 세울 수 없다'며 '이 사람을 데려가면 단지 원역(員役)만 늘릴 것이니 이 사람을 돌려보내고 일행을 검칙하는 일은 신해(申垓)에게 맡기는 것이 편하고 마땅할 듯하다. [[승지]]가 조정에 돌아가 여쭙도록 하라.'고 [[조선 인조|인조]]에게 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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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 가지 증상을 더 고려해보아야 한다. 소현세자가 죽기 얼마 전 다리에 두드러기 형태의 발진이 생기면서 가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폐렴이 진행되면서 정말 우연히 다리에 두드러기가 함께 생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 큰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질병이 있다. 소현세자의 죽기 전 증상처럼 다리에 가려움증이 생기면서 동시에 폐렴과 유사한 증상을 동반하며 사망에 이르는 질병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혈관염이다. 증상은 두드러기 처럼 가려움이 생기면서 피부에 붉은색이나 보라색 출혈반이 생기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혈반염의 증상을 중독으로 인한 증상으로 오인이 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당시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한 핑계에 가까울 수 있다는 뜻이다.
 
 
=== 사후 ===
[[1645년]] 음력 6월 그의 동생 봉림대군이 귀환하자 본인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세자에 책봉시켰다. 친아버지 [[조선 인조|인조]]는 세자를 폐위시키고 '폐세자'라 부르다가 [[대한제국 고종|고종]]때 세자로 복권되었다. 그해 음력 8월 강빈의 동생 강문성이 장사 날짜가 불길하다고 지관인 최남을 찾아가 항의하였는데, 인조가 이 말을 듣고 노해서 강문성과 [[강문명|문명]], [[강문두|문두]], [[강문벽|문벽]] 4형제를 먼 고을에 유배시켰다.<ref>{{웹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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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빈의 친정 노모와 4형제 또한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 유적지능원 ==
그러나 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는 세자의 장례를 크게 간소화했고 인조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에 방문한 적이 없다. 능원은 원래 소현묘라 불렸으나 [[대한제국 고종|고종]]때 세자의 묘를 봉원토록 하는 제도를 시행하며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으며,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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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년]] [[2월 5일]] <small>([[음력 1월 4일]])</small>'''<br>{{국기|조선}} [[한성부]] 경행방 본궁
|'''[[1645년]] [[5월 21일]] <small>([[음력 4월 26일]])</small>''' (33세)<br>{{국기|조선}} [[한성부]] 경행방[[창경궁]] 본궁환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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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 강씨|금천]]
|1611년 - 1646년
|[[강석기]] 姜碩期<br>[[고령 신씨]] 高靈신예옥氏 예옥 禮玉
|인조 5년(1627년) 세자빈 책봉<br>인조 24년(1646년) 사사됨<br>숙종 44년(1718년) 복권<ref>《[[숙종실록]]》 61권, 숙종 44년(1718년 청 강희(康熙) 57년) 4월 8일 병술 2번째기사
----'''임금이 소현세자빈 강씨의 위호를 회복시키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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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군주]] 慶順郡主
|정온 正溫
|1643년 - 1654년1697년
|황창부위 黃昌副尉 [[변광보]] 邊光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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