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현종 (27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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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부친 = [[레 순종|순종간황제]](純宗簡皇帝)
|모친 = [[유신태후|유신황태후]](柔愼皇太后)
|전임자 = [[레 의종|의종휘황제]](懿宗徽皇帝)
|후임자 = [[레 민제|민황제]](愍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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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빈틴]] 13년 4월 초십일([[1717년]] [[5월 20일]])에 태어났다.
=== 즉위 전 ===
==== 황실의 처지 ====
당시 레 왕조는 재건된 이후부터 [[찐 주|찐씨 정권]]의 꼭두각시로 전락했고, 황제 역시 명목상의 군주나 다름없었다. 황제, 황후, 태자를 책봉하거나 폐위할 때도 그들의 개입이 있었다.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정주의 왕들이 칭제만 안 했을 뿐, 그들이 실질적인 군주나 다름없었다.
 
[[롱득]] 4년([[1735년]]), 순종이 죽자 순종의 아들로 뒤를 이어야 했으나 [[찐장]]이 그를 밀어내고 의종을 옹립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순종의 아들 여유조는 순종이 사망하자 장자의 신분이였으니 뒤를 이어 즉위해야 했지만 정왕태비 무씨(武氏)의 압력에 의해 정주의 왕 [[찐장]]이 유조의 즉위를 취소하고, 순종의 동생이자 여유조에겐 숙부인 여유신(의종)을 황제로 옹립한다.
 
[[빈흐우]] 6년 5월 21일([[1740년]] [[6월 14일]]), [[찐조아인]]이 의종에게 요구하여 현종에게 선위하도록 했고, 현종이 즉위하여 연호를 [[까인흥]]으로 개원하였다. 생일을 청화성절(淸和聖節)이라고 하였다.
=== 즉위 후 ===
==== 난세에 즉위하다 ====
[[찐 주|찐씨 정권]](교지국)말기에는 [[찐장]]의 학정과 잦은 전쟁을 일삼아 교지국엔 많은 봉기가 일어났다. 농민들은 '여씨를 돕고 찐씨를 제거한다'라는 명분으로 민란을 일으켰고, 그 중에는 여유조의 삼촌인 [[레주이멋|여유밀]]도 반란세력의 수장으로 참전하였다. 이 때문에 여유조는 한동안 [[찐장]]에 의해 감금당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지국 내에선 폭군 [[찐장]]에게 모든 원인이 있다고 판단, 찐장을 태상왕으로 몰아내고<ref> 말이 좋아 [[태상왕]]이지 폐위시키고 태상왕으로 봉한 것이다.</ref> 동생인 [[찐조아인]]을 정왕(鄭王)으로 세운다. 교지국의 찐조아인은 약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봉기를 진압한 명군이었으며 교지국의 통치기반을 점점 다져갔다.
 
까인흥 46년([[1785년]]), 여러 신하들이 연의흠공인자덕수황제(淵懿欽恭仁慈德壽皇帝)의 존호를 올렸다. 같은 해 9월, [[떠이선 왕조]]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졌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난 1740년 5월, 여유조의 숙부인 의종이 양위하여 여유조는 대월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숙부 의종은 태상황이 되었다.
 
까인흥 47년([[1786년]]) 7월, [[응우옌후에]]를 원수(元帥), 부정익운위국공(扶正翊運威國公)으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응우옌후에가 이 책봉에 기뻐하지 않자 현종은 공주 레응옥헌(黎玉昕)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17일 무오일([[8월 10일]]), 현종은 만수전(萬壽殿)에서 사망하니 나이 70세였다. [[레 민제]]가 뒤를 이었다. 8월, 반석릉(磐石陵)에 안장하였다.
==== 명왕과의 관계 ====
본래 정왕들은 자신이 황제 노릇을 했고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황제를 폐위시키거나 시해하는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현종과 정왕 정영의 관계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찌에우통]] 원년([[1787년]]) 7월, [[묘호]]를 현종(顯宗), [[시호]]를 영황제(永皇帝)로 하였다.
1754년 6월, 찐조아인은 현종을 초청하고 열병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찐조아인은 열병식을 거행하여 자신의 충성심과 뛰어난 군 통솔력을 확인시켜 신임을 얻으려고 했다. 명왕의 이러한 행위는 선대의 정왕들과 달리 황제를 존중하는 신하로써의 면모를 보였다.
 
다음은 관련 사료의 기록이다.
 
{{인용문|찐조아인은 나라의 평온을 빌미로 군인들의 힘을 과시하고, 자주 시찰하였으며 100여명의 군인들을 예우하여 수병들에게 강 한가운데 전함을 만들라 명령했고, 병사들은 질서 정연하게 노를 지었다. 황제는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이후 1759년 태상황 의종이 죽자 장례를 치르고 찐조아인이 현종에게 3년상을 건의했으나 현종은 1년상만 치르고 굳이 2년을 더 제사지내진 않았다. 1761년 11월 현종은 [[청나라]] 사신에게 조서를 받고 안남국왕으로 책봉되었고 1764년 1월에는 장남인 [[레주이비]]를 태자로 책봉했다.
 
이처럼 재위 초반에는 현종 역시 선대의 황제들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정왕들의 섭정에만 흘러가는 평범한 꼭두각시 황제였다.
 
==== 서산의 난 ====
한편 남부의 광남국은 암군 완복순과 장복만의 횡포로 민심이 흉흉해졌고 마침내 1771년 남부 [[응우옌 주|응우옌씨 정권]](완주)에서 [[완문악|완악]], 완여, [[완혜]] 삼형제가 봉기를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는데(서산당의 난) 현종은 황실의 권력을 되찾을 좋을 기회라고 판단하여 군사를 지원했다.
 
서산당은 단시간에 3개의 성을 점령했으며, 곧이어 정주의 [[찐섬]]도 완주의 간신 즈엉푹로안을 토벌한다는 명분 하에 군을 보내 완주를 공격했고 완주의 수도 부춘을 점령했다. 완왕 완복순은 도주했으며 얼마 안가 몇달 후, 서산군의 완악은 동생 완혜에게 기습을 명해 승리했고 자딘을 함락, 승리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완주의 왕 [[응우옌푹즈엉]]이 항복하여 완주는 멸망하였다.
 
===== 정주의 멸망 =====
1767년 찐조아인이 죽자 그의 세자 [[찐섬]]이 정주의 왕이 되었다. 찐섬은 왕이 되자 세자 시절 현종의 태자인 [[레주이비]]에게 복수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자세한건 찐섬 항목 참조. 그리고 찐섬은 레주이비가 찐조아인의 첩과 간통했다고 모함하여 현종으로 하여금 그를 폐위시키게 하고 현종의 둘째 아들인 [[레주이껀]]을 태자로 책봉하게 했다. 또한 찐섬은 여씨 대월을 넘보고 있었기에 [[청나라]]의 황제에게 여씨 일족에는 유능한 자가 없으니 안남국왕 책봉을 부탁하는 조서를 사람을 시켜 보내기까지 했다.<ref> 그러나 조서를 보낸 사람은 여씨의 충신이였기에 조서를 불태우고 자살했다.</ref>
 
1782년 정주왕 찐섬이 죽고 그의 세자인 [[찐깐]]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즉위한 찐깐은 5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고, 잔병이 많아 제대로 통치를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염군공 응우옌찌엠은 정왕태비에게 아뢰어 폐세자 [[찐똥]]을 섭정으로 임명한다는 동의를 얻어내었고, 찐똥은 반란을 일으켜 찐깐을 폐위시킨 후 섭정이 아닌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한 찐똥은 이전 찐섬이 감옥에 가둔 [[레주이비]]의 가족들을 석방해줬고 그 중에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 [[레 민제|레주이끼]]도 있었다. 황사손이 풀려나자 [[레주이껀]]을 폐위하고 레주이끼를 황태자로 책봉케 하였다.
 
찐똥은 삼부군(三府軍)과 결탁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으로 즉위했는데, 이 삼부군은 점점 세력이 커지자 교만해졌고, 찐똥의 측근인 응우옌칸과 즈엉쿠옹, 웅우옌찌엠은 삼부군의 후환을 우려해 그들을 제거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삼부군에게 발각되었고, 분노한 삼부군은 정주에 쳐들어가 직접 응우옌찌엠을 죽였다.<ref> 즈엉쿠옹은 정왕태비의 동생이라 처형당하지 않았고, 응우옌칸은 그 전에 찐똥이 삼부군에 의해 옥에 갇히자 살 수 있었다.</ref> 삼부군의 난이 일어난 데다 동시에 [[메뚜기]] 떼로 인한 피해와 [[기아]]가 발생하자 봉기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결국 1786년 [[완문악|완악]]이 [[완혜]]를 보내 투언호아를 공격하게 했고 아무런 방비도 갖추지 않은 투언호아의 방비장인 팜응오꺼우는 대패, 투항하였다. 계속해서 완혜는 탕롱으로 진격했고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찐똥은 산서(山西) 지방으로 도주하다가 농민에게 잡혀 완혜에게 압송당했다. 굴욕을 버티지 못한 찐똥은 자살했고 이로써 정주가 멸망했다.
 
===== 서산의 집권과 사망 =====
찐똥이 자살하고 완혜가 정주를 장악했을 때 현종은 병에 걸렸다. 완혜는 현종의 안부를 물으며 입성을 요구했는데 현종은 동의하였다. 현종은 만수전(萬壽殿)에서 서산군의 완혜를 접견했고 본래 정주의 왕이 앉아 황제를 맞이하는 자리에 완혜를 앉히도록 했다. 권력의 주도 세력이 정씨(鄭氏)에서 서산 세력으로 바뀐 것이었으며 기존 정주의 왕을 대접하던 것처럼 공주를 완혜와 결혼시켰다. 완혜와 접견한 현종은 위독해지자 살날이 얼마 안남았음을 느끼고 태손 레주이끼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용문|나는 일찍 짐을 덜어낼 것이다.|}}
태손이 울면서 절하자,
 
{{인용문|[[떠이선 왕조|또 다른 군사]]들도 [[찐 주|그들]]과 똑같은 노릇을 할 테니 황실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군사들과 협력하지 않는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완혜와 대면한 바로 이튿날에 사망하니 향년 70세였다.
 
== 평가 ==
후세에선 현종을 나약한 왕으로 평가했으나 마냥 부정적으로 보진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중흥 레 왕조는 정주가 실권을 쥐고 있었기에 황제들은 꼭두각시나 다름없었으며 현종도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대 황제들의 시해 사건과 강제 폐위는 거울이 되어 현종을 위축되게 만들었고 감히 정주에 대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서산당의 난을 권력판을 뒤집을 계기라고 생각해 군사를 지원하는 판단력을 보여주는 등 시도라도 했으며 결과적으론 정왕 찐똥이 자살해 정주 멸망 계획은 성공했다. 그러나 서산의 집권 역시 정주와 별로 다를게 없었고 후여조는 현종 바로 다음 대인 민제가 서산조에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로 도망간 후, 서산-청 전쟁을 계기로 완전히 멸망한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