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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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日反共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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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에 건준 전남지부의 트럭을 타고 상경했다는 설도 있다. [[8월 17일]] 오전 11시 광주극장에서 전남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때 건준 전남지부 사무실은 고광표(전남건준 재무부장)가 운영하던 광주 동구 대인동 창평상회였다. 이곳에서 모인 건준간부들은 임시 대표단을 구성, 신임장을 받기 위해 이날 밤 8시쯤 트럭을 타고 급히 서울로 향했다.<ref name="geonjeon">[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6/19/2006061970740.html <nowiki>[</nowiki>남도이야기<nowiki>]</nowiki> '광주 1945' (上)] 조선일보 2006.06.19</ref> 이 트럭이 서울로 갈 것이란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김성삼(본명 박헌영)이 찾아와 동승했다 한다.<ref name="geonjeon"/> 박헌영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하기 위해 공산조직인 '[[경성콤그룹]]' 조직책의 도움으로 광주 백운동 벽돌공장에서 신분을 완전히 숨긴 채 3년 동안 은신해왔었다.<ref name="geonjeon"/>
 
1945년 8월 15일 밤, 이승엽을 비롯한 서울의 명망있는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청년회관(YMCA) 왼편에 있는 장안빌딩에 모여들었다. 다음날 아침 장안빌딩 건물에 조선공산당 현판이 내걸렸다.<ref name="jangjang">[http://weekly1.chosun.com/site/data/html_dir/2002/12/16/2002121677029.html {{웨이백|url=http://weekly1.chosun.com/site/data/html_dir/2002/12/16/2002121677029.html |date=20160305085130 }} <nowiki>[</nowiki>서울 속살 엿보기<nowiki>]</nowiki> ⑨ 사그라지는 ‘500년 전통’ 종로]</ref> [[8월 18일]]에는 [[우미관]]에서 외곽조직인 [[공산주의청년동맹]]을 재건립하며 조직확대를 꾀했으나 박헌영 일파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조선공산당]] 창당을 선언하자 [[8월 24일]] 자진 해체한다.<ref name="jangjang"/>
 
===== 8월 테제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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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고집스럽고 괴팍스러운 인간<ref name="parkgapd118"/> 이라는 평가도 있다. 일에 있어서 철저히 자기 사람으로 생각되는 사람들만 썼기 때문에 편협적인 점, 선동력과 포용력등 대중적인 정치가로서는 부적격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ref name=autogenerated7 /><ref group="주해">한편, 프락치 지휘부 [[김형선]]을 비롯해서 공산주의 이론가 [[김오성]]등 인민당 프락치로 심어두고, [[장안파 공산당]]과 [[여운형]] 계열에서 꾸준히 사람을 빼오는 등 포섭노력을 벌인 것으로 보아 자기 편만 신뢰하였다는 비판은 유효하지 못하다는 반론도 있다.</ref> 그밖에 쇼맨십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남한에서는 남한을 적화하려던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다.<ref>[{{웹 인용 |url=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12058 |제목=코나스넷<!--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08-07-1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14218/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12058 |보존날짜=2016-03-04 |깨진링크=예 }}</ref> 또한 [[한국 전쟁]]의 원흉 중의 한사람이라는 비판도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3&aid=0002161003 "전쟁 나면 남조선 20만 봉기" 박헌영, 뭘 믿고 장담했을까]</ref> 일부에서는 인민군이 남진하면 20만 명의 남로당원이 호응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근거삼기도 한다<ref name="이종석250"/> 그의 이념에 대해서도 편협하고 종파적인 교조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다.<ref>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역사비평사, 2006) 443페이지</ref> 어떻게든 [[남한]] 체제에 적응하지 않고 월북하여 몰락을 자처했다는 비판도 있다. 반면, 북조선에서는 [[김일성]]과의 정치적 대립구도에서 밀려나 숙청되어, '미국의 스파이', '반당종파분자'라는 죄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으며,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북한과 함께 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는 비판도 있다. 남로당의 박헌영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좌우합작노선의 여운형·김규식도 ‘북한과 함께’였으며 김구 또한 결국은 북한을 찾아가는 무리수를 범했다는 것이다.<ref name="pib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