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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어: Troisième République française)은 1870년부터 1940년까지 69년간 프랑스에서 존속한 가장 안정적이었던 공화정 체제이다. 또한 1789년 이후 체제 중 프랑스의 안정적인 첫 체제이기도 하다.

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1870년1940년
 

 

국기
표어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프랑스어: 자유, 평등, 형제애)
국가 라 마르세예즈
French Republic 1914.svg
수도 파리 북위 48° 51′ 24″ 동경 2° 21′ 03″ / 북위 48.856667° 동경 2.350833°  / 48.856667; 2.350833
정치
공용어 프랑스어
정부 형태 공화국
대통령
1871-1873
1932-1940

아돌프 티에르 (초대)
알베르 르브륑 (마지막)
역사
 • 스당 전투 패배
공화국 선언
1870년 9월 4일
 • 파리 코뮌 붕괴 1871년 3월부터 5월
 • 헌법 제정 1875년
 • 언론의 자유 1881년 7월 29일
 • 쥘 페리 법
(무상,의무,세속 교육)
1881년부터 1882년
 • 발데크-루소 법
(노조 결사의 자유)
1884년 3월 21일
 • 드레퓌스 사건
(정교분리)
1894년부터 1906년
1905년 12월 9일
 • 베르사유 조약 1919년 6월 28일
 • 독일과 휴전 체결
국회, 페탱에게 전권 위임
1940년 6월 22일
1940년 7월 10일
 • 프랑스 개헌 국민투표 1945년 10월 21일
인구
1938년 어림 41,560,000명
기타
통화 프랑스 프랑 (F)

대혁명 이후로 프랑스는 80년간 세 차례의 입헌 군주정, 짧은 두 번의 공화정(각기 12년과 4년씩)과 두 번의 제정, 총 일곱 개의 정치 체제를 겪었다. 이러한 혼란은 1870년부터 1879년까지 왕정 철폐와 제3공화국 헌법 제정을 위해 생긴 9년간의 국회의 우유부단을 보여 준다. 헌법 제정의 타협으로, 1875년 헌법은 양원제 의회를 확립했고, 공화파들은 프랑스 제2공화국의 선출된 대통령 나폴레옹 3세의 1851년 쿠데타를 떠올리며 국가 수장의 대의적 역할에 동의한다.

제3공화국은 필리프 노르가 말한 것처럼 공화주의자들의 시대, 말하자면 교육과 정교분리, 동맹파업과 노조결성의 자유를 명시한 위대한 법들이 설명하는, 강력한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시대에 설립되었다. 이 시대는 프랑스인의 삶이 '혁명이 없는 때에 살고 있는듯 정치에 열광적이던' 시대이기도 하다. 이것은 뱅상 뒤클레르정치국가로서 프랑스 정신의 탄생 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대중들이 원하던 잇따른 사회개혁들, 특히 피고용인을 위한 법률의 제정이 이 시대의 특징이였다.

더욱이 제3공화국은 프랑스 정치사에서 12년밖에 지속되지 않은 제1공화국(1792~1804)과 4년만에 소멸된 제2공화국 (1848~1852)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공화정 체제를 장기적으로 자리잡게 했다. 보불전쟁의 패배로 건국된 제3공화국은 독일과의 대립이라는 맥락속에서 발전했다.

1940년 7월 10일, 나치 독일프랑스 침공으로 국회는 페텡에게 권력을 위임했다. 다음날인 11일에 페텡은 마침내 '프랑스의 국가원수' (비시 프랑스)가 되었고, 제3공화국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린다.

목차

역사편집

공화정과 왕정간의 초기 갈등 (1870-1879)편집

프랑스는 1870년에 일어난 보불전쟁에서 패배해 당시 제2제정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내쫓고 1871년 아돌프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하는 제3공화국을 수립했다.

같은 해에 일어난 코뮌주의자들의 자치적 사회주의 정권(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해군의 함정정비에 대한 계획을 세워 해군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보불전쟁 종결과 그 여파편집

국민 방위 정부 (Gouvernement de la Défense nationale)편집

상세 문서 : 1870년 9월 4일 프랑스 공화국 선포국민 방위 정부

보불전쟁 당시 군사작전들은 연이어 실패하고 심지어 1870년 9월 2일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 와중 폭동에 가담한 대중들에 의해 부르봉궁 침탈을 시작으로 입법부가 공격받고 마침내 9월 4일 레옹 강베타에 의해 파리시청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국민 방위 정부는 부대집결을 목표로 임명되었던 수도 사령관인 트로쉬 장군을 지도자로 내세우며 조직되었다. 다른 장관급 인사들로는 쥘 파브르 (외무부 장관 겸 부통령), 쥘 페리 (정무차관), 레옹 강베타 (내무부 장관), 에르네스트 피카르 (재무부 장관), 앙리 로슈포르, 쥘 시몽 (교육부 및 문화예술부 장관), 아돌프 르 플로 (국방부 장관), 마르탱 푸리숑(해군부 및 식민지부 장관), 아돌프 크레미외 (법무부 장관) 이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파리의 공화파 대표였다.

바젠느의 군대는 메츠 포위 속에서 계속 저항했다. 파리 역시 9월 18일부터 포위당했다. 1870년 9월 30일에는 시민들의 입대 의지를 돋구고자 첫 대출 유예명령이 공표되었다. 10월 7일에는 강베타가 지방에서 군대를 재조직하기 위해 열기구를 타고 파리를 떠났다.

10월 30일 15만명에 달하는 메츠의 병력과 바젠느의 서두른 항복은 프랑스에 심각한 위기를 야기했다. 투르의 정부 대표단이 '루와르 부대'의 편성을 하고있던 도중에 항복을 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프로이센보르도로 후퇴한 정부 대표단을 따르는, 훈련도 안되있고 무장 상태도 나쁜 새 사단에만 집중 할 수 있었다.

1871년 1월 18일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는 최종적으로 베르사유궁에서 독일의 통일을 선언했다. 1월 23일부터 파리는 폭격과 위협과 기근의 고통을 겪었다. 외무부 장관 쥘 파브르는 독일과의 협상을 하기 위해 정부인사들과 함께 수도에 머물렀다. 휴전 협정은 포위된 지 132일이 지난 1월 28일이 되서야 체결되었다.

1871년 2월 8일 선거와 평화편집

본문 : 국민 의회 (1871) 참조.

1871년 1월 29일 법령은 선거 방식을 정착시켰고, 제2공화국의 공화파 전통을 회복했으며, 제2제정하의 법이었던 단기 2회제 투표와 반대되는 연기명 투표, 지방 투표, 과반수 투표방식의 1849년 3월 14일 제정되었던 선거법을 시행했다. 선거는 특수한 환경에서 진행되었는데 40개 도, 40만명의 프랑스인 죄수, 그리고 파리를 제외한 시골은 선거에 준비되지 않았다. 거기다 투표는 시골 보수지역 유권자들을 기권시키려는 목적으로 도의 중심지에서만 전개되었다.

법률의 제정이 아니라 전쟁 혹은 평화가 선거의 주요 쟁점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공화파들은 최후까지 적국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지속하길 원하는 레옹 강베타를 비롯한 급진파, 평화를 원하던 온건파로 분열되었다. 왕당파부터 부르주아 자유주의자까지 다양한 자들로 구성된 보수파는 평화 추구를 목표로 단결했다. 1871년 2월 8일, 왕당파들이 새 국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 675명의 의석은 400명 정도의 왕당파 (182명의 정통왕조파와 214명의 오를레앙파로 구성), 250명의 공화파, 펠릭스 피야브누아 말롱같은 소수의 사회주의자들, 코르시카샤랑트에서 뽑힌 몇 명의 보나파르트파로 구성되었다. 침략받은 동부 지방은 중부 지방과 파리와 마찬가지로 공화파와 찬전주의가 주를 이뤘다. 전쟁에 지친 프랑스인들은 투표에서 왕당파 지지를 보인걸 제외하고는 평화 지지를 위해 투표하려 했다. 실제로 앙드레 앙크르베는 '왕당파의 대다수는, 어떤 면에 있어서, 1851년의 루이-나폴레옹과 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르려고 한다, 즉 그들은 여론의 과도한 추세와 더불어 (보불전쟁같은) 시국에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려고 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그들이 평화를 약속했기 때문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왕당파에 대한 그들의 주된 의견은 프랑스 대중의 의견과 합일하지 않는다'고 저술했다.

1871년 2월 16일, 대혁명 후부터 혁명 바깥에 끊임없이 존재했던 왕당파의 지지를 받은 온건 공화파인 쥘 그레비국민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전쟁에 대한 그레비의 적대감과 질서수호의 의지는 그를 대다수의 이상적인 후보로 만들었다. 1871년 2월 17일, 루이-필립 시절의 내무부 장관이었던 아돌프 티에르는 거의 만장일치로 프랑스 공화국 행정수반 (Chef du pouvoir Exécutif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으로 임명되었다. 티에르는 '그가 선택한 장관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국회 권력하의 그의 직권을 행사하는, 국가적 위기에 필요한 지도자'였다. 2월 19일 그는 중도 우파와 사법부 장관 (Portefeuille de la Justice) 쥘 뒤포르가 수장인 온건 좌파 장관들로 구성된 정부를 조직했다. 2월 19일 자신의 계획하에 티에르는 '평화를 추구하고, 재조직하며, 신용을 높이고, 일자리를 소생시켜야 한다'고 국회에 역설한다. 1871년 3월 10일 보르도의 약속으로 티에르와 국회는 행정수반은 헌법 개정을 국회에 미리 알리지 않고서는 진행하지 않는 대신 국민 필수품 제공과 독일과의 협상이라는 암묵의 거래를 했다.

파리 코뮌 (1871년 3월 18일 - 5월 28일)편집

본문 : 파리 코뮌 참조

파리 코뮌은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 민중들이 처음으로 세운 사회주의 자치 정부이다. 세계 처음으로 노동자 계급의 자치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라고 평가되고 있는 파리 코뮌은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책들을 실행에 옮겼으며, 단기간에 불과하였지만 사회주의공산주의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같은 해 3월 3일부터 마르세이유, 리옹, 생테티엔, 툴루즈, 나르본, 그레노블, 리모주 등의 지방 도시에서도 같은 코뮌 결성이 선언되었지만 모두 단기간에 진압되었다.

제3공화국의 첫날편집

아돌프 티에르, 국가적 위기에 필요한 지도자편집
티에르의 개혁편집

공화국 행정수반으로서 티에르는 군사적, 행정적, 재무개혁을 주도한다.

아돌프 티에르 : 프랑스 제3공화국 초대 대통령편집

아돌프 티에르는 국회에게 독일 군대를 프랑스 밖으로 내보낼 협상을 하는 데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다.

왕정복고시도편집
도덕적 질서로의 회귀편집
7년간 왕정복고를 기다린 대통령편집
공화정을 향한 변혁편집
1875년 헌법편집
 
제 3 공화국 정치 계통도
1877년 5월 16일 헌정위기와 공화파의 승리편집

제3공화국의 벨 에포크 (1879-1914)편집

기회주의 공화파 : 실용주의 추구 (1879-1898)편집

쥘 그레비는 마크마옹의 사임 직후 1879년 1월 30일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879년 2월 14일, 라 마르세예즈국가로 지정되었다. 1795년에 제정된 법에 따라서 지정된 것인데, 국가 제정 법령이 전대 왕정과 제정에 의해서 폐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정 된 것이다. 1879년 6월 21일 국회는 베르사유에서 열리는 공화국 대통령 선거 회의를 제외하고 항상 파리에 상주하게 되었다. 1880년 7월 6일 1790년 연방을 기념하고자 '7월 14일'이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1880년 7월 11일 파리 코뮌 지지자들은 사면되었다.

쥘 페리 내각 (1879-1885)편집

1879년 공화파는 정치적으로 온건파이며 복지면에서는 보수적인 중도 좌파와 쥘 페리의 공화파 좌파, 강베타의 공화파 연합과 클레망소같은 급진파로 나눠졌다. 1881년 총선에서는 공화파가 보수파를 상대로 국회 의석 457석 대 88석을 차지하며 압승했다. 쥘 페리는 1879년부터 1885년까지 초기 정부 시절의 교육과 외무에 있어서 거물 정치인이었다. 그는 연이어서 학교와 사법부에 관한 개혁, 개헌을 시작했다.

학교 관련 법안편집

쥘 페리 법 참고

헌법 개정편집

1875년 개헌을 하는데 있어서 국회 내에서 갈등이 많았는데 같은 공화파 사이에서도 의견이 서로 엇갈렸다. 급진파는 1792년부터 1795년 동안 직접 선거로 국회의원을 선출한 자코뱅의 단원제 의회를 주장했고, 이 주장은 곧 상원의 극심한 반대를 맛보았다.

반면, 자유 공화파들은 하원 견제를 목적으로 상원 의회 유지를 원했다. 공화파 거물 쥘 페리는 상원을 옹호했는데, 상원은 이에 따라 학교 문제와 특히 세속주의에 있어서 쥘 페리 편을 들어주었다.

1884년 8월 14일 통과한 헌법은, 왕당파들을 억제하고자 전 군주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으며 고로 정부 체제를 공화국에서 다른 체제로 바꾸는 것을 금지했다.

공화파의 자유편집
불랑제 사건편집

급진 공화파 : 과감한 진보로의 변혁 (1898 - 1914)편집

드레퓌스 사건 (1894–1906)편집
정교분리편집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3공화국의 붕괴까지 (1914-1940)편집

제1차 세계대전 (1914–1918)편집

제3공화정 8대 대통령인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이 재임 중이었던 1914년 8월,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독일제국은 전쟁초기에 단숨에 프랑스를 정복할거라 확신했었지만, 프랑스는 과거 보불전쟁(1870년~1871년)에서의 굴욕적 패배에 대한 복수심이 강하게 불타올랐기에 저항이 강했다.

따라서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무찌르면서 전쟁의 양상은 참호전 형식으로 장기전이 되어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1917년까지 독일군과 대치 상황을 두고 지겹게 싸웠고 어느 한 쪽으로 밀리지 않는 양상이 되었다. 1917년 미국이 참전하면서 독일군을 격파하였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끝낸다.

1920년대 : 어려운 전후관리 (1919–1929)편집

위기와 붕괴 (1929-1940)편집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는 패전국인 독일에 대해 베르사유 조약을 통하여 가혹하게 다뤘는데, 이는 프랑스가 전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함은 뒷날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불씨가 되기도 한다.

프랑스는 전쟁을 두려워해서 독일의 히틀러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나라를 합병하는 데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 알베르 르브륑 대통령은 독일군의 침략을 대비해 서부 전선에 마지노 방어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군은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로 들어와 간단히 프랑스군을 무찌름으로써 마지노 방어선은 써 보지도 못하고 알베르 르브륑 대통령은 결국 수도 파리를 내주었다.

알베르 르브룅 대통령의 뒤를 이어 친독일주의자 필리프 페탱이 대통령이 되어 프랑스 남부에 나치 독일의 꼭두각시 정부인 비시 정부를 세움으로써 붕괴되었다. 붕괴 유지했으나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연합군의 공격으로 독일군이 밀리자 1944년 파리가 탈환되고 비시 정부는 붕괴되었고 뱅상 오리오에 의해 제4공화정이 일어섰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역대 대통령편집

프랑스의 대통령 목록 참고.

프랑스 제3공화국의 역대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1871~1873) 
쥘 그레비(1879~1887) 
사디 카르노(1887~1894) 
펠릭스 포레(1895~1899) 
에밀 루베(1899~1906) 
레몽 푸앵카레(1913~1920) 
폴 두메르(1931~1932) 
알베르 르브륑(1932~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