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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어: Troisième République française)은 1870년부터 1940년까지 69년간 프랑스에서 존속한 가장 안정적이었던 공화정 체제이다. 또한 1789년 이후에 인정된 프랑스의 첫 체제이기도 하다.

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1870년1940년
 

 

표어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프랑스어: 자유, 평등, 형제애)
국가 라 마르세예즈
French Republic 1939.svg
수도 파리
정치
공용어 프랑스어
정부 형태 공화국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 (1871~1873)
알베르 르브룅(1932~1940)
역사
 • 수립
• 폐지
1870년 9월 4일
1940년 6월 22일
인구
1938년 어림 41,560,000명
기타
통화 프랑스 프랑

대혁명 후, 프랑스는 80년간 세 입헌 군주정, 짧은 두 공화정(각기 12년과 4년씩)과 두 제정, 총 일곱개의 정치 체제를 겪었다. 이런 혼란은 1870년부터 1879년까지 9년간의 국회ー왕정 철폐와 제3공화국 헌법 제정을 위해 생긴ー의 지지부진함을 설명해준다. 헌법 제정의 타협으로, 1875년 헌법은 의회 양원제를 확립했고, 공화파들은 프랑스 제2공화국의 선출된 대통령 나폴레옹 3세의 1851년의 쿠데타를 떠올려 국가 수장의 대의적 역할에 동의한다.

제3공화국은 필리프 노르가 말한 것처럼 '공화주의자들의 시대', 다시 말해 교육, 정교분리, 동맹파업과 노조결성의 자유를 명시한 위대한 법들이 설명하는, 강력한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시대에 설립되었다. 이 시대는 프랑스인의 삶이 '혁명이 없는 때에 살고 있는듯 정치에 열광적이던' 시대이기도 하다. 이것은 뱅상 뒤클레르가 '정치국가같은 프랑스 정신의 탄생' 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사회가 갈망한 사회개혁의 연속들, 특히 피고용인을 위한 법률의 제정으로 특징되는 시대였다.

더욱이 제3공화국은 프랑스 정치사에서 각기 12년과 4년밖에 지속되지 않은 제1공화국(1792~1804)과 제2공화국 (1848~1852)의 실패 후 공화정 체제를 장기적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보불전쟁의 패배로부터 건국된 제3공화국은 독일과의 대립이라는 맥락속에서 발전했다.

1940년 7월 10일, 독일의 프랑스 침공에 직면한 국회는 페텡에게의 권력 위임을 투표했다. 다음날 11일, 페텡은 그 스스로 '프랑스 국가원수' (비시 프랑스)가 되었고, 실질적으로 제3공화국은 끝났다.

목차

공화정과 왕정간의 망설임편집

1870년 보불전쟁 종결과 그 여파편집

국가 방위 정부 (Gouvernement de la Défense nationale)편집

상세 문서 : 1870년 9월 4일 프랑스 공화국 선포국가 방위 정부

보불전쟁중, 군사작전들은 마침내 패전과 더불어 1870년 9월 2일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기에까지 이르렀다. 부르봉궁 침탈을 시작으로 폭동에 가담한 대중들에 의해 입법부가 공격받고 9월 4일 레옹 강베타에 의해 파리시청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국가 방위 정부는 부대집결을 목표로 임명되었던 수도 사령관 트로쉬 장군을 지도자로 조직되었다. 다른 장관급 인사들은 쥘 파브르 (외무부 장관 겸 부통령), 쥘 페리 (정무차관), 레옹 강베타 (내무부 장관), 에르네스트 피카르 (재무부 장관), 앙리 로슈포르,쥘 시몽 (교육부 장관, 문화예술부 장관), 아돌프 르 플로 (국방부 장관), 마르탱 푸리숑(해군부와 식민지부 장관 ), 아돌프 크레미외 (법무부 장관) 이 있었으며 대부분이 파리의 공화파 대표였다.

바젠느의 군대는 메츠 포위 속에서 계속 저항했다. 파리 역시 9월 18일부터 포위당했다. 1870년 9월 30일에 사람들의 입대 의지를 돋구고자 첫 대출 유예명령이 공표되었다. 10월 7일에는 강베타가 지방에서 군대를 재조직하기 위해 열기구를 타고 파리를 떠났다.

10월 30일 15만명에 달하는 메츠의 병력과 바젠느의 서두른 항복은 프랑스에 심각한 위기를 야기했다. 투르의 정부 대표단이 '루와르 사단'의 편성을 하고있을 때 항복한 것이다. 프로이센은 그리하여 보르도로 후퇴한 정부 대표단을 따르는 새 사단ー훈련도 안되있고 무장 상태도 나쁜ー에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871년 1월 18일 독일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의 통일을 선언하는 걸 보았다. 1월 23일부터, 파리는 폭격과 위협과 기근의 고통을 겪었다. 외무부 장관, 쥘 파브르는 독일과의 협상을 하기 위해서 정부인사들과 함께 수도에 머물렀다. 휴전 협정은 포위된 지 132일이 지난 1월 28일 체결되었다.

제3공화국의 탄생편집

프랑스는 1870년에 일어난 보불전쟁에서 패배해 당시 제2제정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내쫓고 1871년 아돌프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하는 제3공화국을 수립했다.

같은 해에 일어난 코뮌주의자들의 자치적 사회주의 정권(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해군의 함정정비에 대한 계획을 세워 해군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편집

제3공화정 8대 대통령인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이 재임 중이었던 1914년 8월,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독일제국은 전쟁초기에 단숨에 프랑스를 정복할거라 확신했었지만, 프랑스는 과거 보불전쟁(1870년~1871년)에서의 굴욕적 패배에 대한 복수심이 강하게 불타올랐기에 저항이 강했다.

따라서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무찌르면서 전쟁의 양상은 참호전 형식으로 장기전이 되어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1917년까지 독일군과 대치 상황을 두고 지겹게 싸웠고 어느 한 쪽으로 밀리지 않는 양상이 되었다. 1917년 미국이 참전하면서 독일군을 격파하였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끝낸다.

제2차 세계대전과 제3공화국의 붕괴편집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는 패전국인 독일에 대해 베르사유 조약을 통하여 가혹하게 다뤘는데, 이는 프랑스가 전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함은 뒷날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불씨가 되기도 한다.

프랑스는 전쟁을 두려워해서 독일의 히틀러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나라를 합병하는 데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 알베르 르브륑 대통령은 독일군의 침략을 대비해 서부 전선에 마지노 방어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군은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로 들어와 간단히 프랑스군을 무찌름으로써 마지노 방어선은 써 보지도 못하고 알베르 르브륑 대통령은 결국 수도 파리를 내주었다.

알베르 르브룅 대통령의 뒤를 이어 친독일주의자 필리프 페탱이 대통령이 되어 프랑스 남부에 나치 독일의 꼭두각시 정부인 비시 정부를 세움으로써 붕괴되었다. 붕괴 유지했으나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연합군의 공격으로 독일군이 밀리자 1944년 파리가 탈환되고 비시 정부는 붕괴되었고 뱅상 오리오에 의해 제4공화정이 일어섰다.

역대 대통령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