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허씨

한국의 성씨

하양 허씨(河陽許氏)는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하양 허씨
河陽許氏
나라한국
관향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시조허강안(許康安)
집성촌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용전리
전라북도 진안군 안천면 삼락리
주요 인물허주, 허조, 허성, 허후, 허계, 허관, 허임, 허재영, 허청일, 허용석
인구(2015년)20,608명

역사 편집

시조 허강안(許康安)은 고려 현종 때 호부낭장(戶部郞將)을 역임하였으며 말년에 호장(戶長)을 지내고 하주자사(河州刺史)가 되어 하주(河州ㆍ하양의 옛 지명)에 정착하였다.[1] 그는 문헌에 의하면 가락국 허황후(許黃玉)의 33세손으로 전하고 있다.

허조(許稠)는 조선 세종 때 좌의정에 올랐고 사후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본관 편집

하양(河陽)은 경상북도 경산시(慶山市)의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려 초에는 하주(河州)라 불리며 995년(성종 14)에 자사(刺使)가 파견되었다. 1018년(현종 9)에 하양(河陽)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현감을 두었고, 1742년(영조 18)에 화성현(花城縣)으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하양군(河陽郡)으로 바뀌었고, 1896년 경상북도로 이관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이 되었고, 1973년에 하양읍으로 승격하였다. 1995년 경산군과 경산시의 통합으로 경산시 하양읍이 되었다.

인물 편집

  • 허주(許周, 1359년 ~ 1440년): 고려조에 문과를 급제하고, 조선조에 형조참의, 호조좌참, 전라도관찰사, 참지의정부사, 한성부윤, 경기도관찰사 등을 거쳐 1418년(세종 즉위년) 판한성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간숙(簡肅).[2]
  • 허조(許稠, 1369년 ~ 1439년): 1390년(고려 공양왕 2)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세종 때 좌의정에 이르렀고,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3]
  • 허성(許誠): 경기도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중추원사·이조판서·예문관대제학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성격이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 허후(許珝):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 ·형조참판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좌찬성(左贊成)이 되어 어린 단종을 도왔다. 계유정란을 일으킨 수양대군에 의해 거제도에 유배, 교살되었다.
  • 허계(許誡):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下賜)받았으며,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였다.
  • 허임(許任): 조선 선조ㆍ광해군 때의 명의(名醫)이며, 조선 시대 제일의 침의(鍼醫)로 알려졌으며, 1644년에 ≪침구경험방≫을 간행하였다. 저서에 ≪사의경험방≫이 있다.

과거 급제자 편집

하양 허씨는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 15명을 배출하였다.

고려 문과

허조(許稠)

문과

허계(許誡) 허관(許寬) 허국(許㥌) 허량(許亮) 허보(許輔) 허부(許溥) 허성(許誠) 허수(許洙) 허식(許栻) 허유(許鍒) 허조(許慥) 허지(許遲) 허평(許坪) 허후(許詡) 허후(許詡)

무과

허담(許墵) 허대중(許大重) 허봉갑(許鳳甲) 허응길(許應吉) 허인국(許仁國) 허인길(許仁吉) 허징(許瀓) 허창무(許昌茂)

생원시

허강(許崗) 허건(許鍵) 허관(許寬) 허만(許曼) 허식(許湜) 허신(許愼) 허영(許穎) 허원(許洹) 허은(許檼) 허종선(許從善) 허증(許增) 허훈(許薰)

진사시

허경(許璟) 허석(許鉐) 허소(許邵) 허손(許遜) 허수(許洙) 허용두(許容斗) 허인(許𡐔) 허재(許渽) 허정회(許庭檜) 허집(許鏶)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편집

인구 편집

  • 2000년 16,344명
  • 2015년 20,608명

각주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