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인도교 폭파

(한강 다리 폭파 사건에서 넘어옴)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漢江人道橋爆破事件)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한강인도교를 폭파한 사건이다.

당시 촬영된 항공사진. 한강철교(좌측)과 이미 파괴된 인도교(우측)

사망자 수치는 미 군사고문단 장교가 군인, 경찰, 민간인 등을 포함하여 500~800명으로 추정한 기록이 존재하며[1] 현재까지 신원이 밝혀진 사망자 수치는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 77명이다.[2](신원이 밝혀진 사망자 기록이 77명뿐이라는 의미로 이를 전체 사망자 수치로 확정할 근거는 전혀 없다)

배경 편집

국방군은 미아리 회기동 방어선을 강화했으나 장비와 전장의 환경상 한계가 있었다. 6월 27일 자정을 전후해 인민군 전차대가 길음교로 진출했고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육군본부는 서울을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다.[3] 채병덕은 한강대교를 넘어 이동하고 이후 강영훈 대령을 수행원으로 한 김백일 대령이 이를 인수하였다.[4] 장비의 운송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주한미군군사고문단과 채병덕 장군간에는 병력과 장비가 강 이남으로 이동한 후에 다리를 폭파하기로 합의가 되어있었으나, 김백일 대령은 오전 1시 30분을 기해 다리가 폭파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하달하였다.[5]

전개 편집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폭파 이후 북한군 전차가 28일 오전 8시경에 용산 삼각지에 진입했으며 주력부대는 이날 11시 30분에 진입하였으므로 국군 주력부대와 서울 시민들이 강남으로 철수 있는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었다.

최창식 대령은 항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처음에 체포된 직접적인 원인은 한강교 폭파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경북 군위에서 국군 공병대가 제5연대와 제2연대의 후방도로에 지뢰를 매설했는데 지뢰 표지가 불분명하여 제5연대장 이영규 중령을 비롯한 50여명의 아군 피해자가 나와 이때 최창식 대령이 체포되었고 차제에 한강 폭파의 책임을 밝혀 국민의 여론을 무마할려고 하였다.

결국 군당군은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최창식 대령을 8월 28일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한강대교(인도교)는 폭파됐지만 화물을 수송하던 한강철교는 완전히 폭파되지 않았다. 인민군 4사단은 보수 공사 이후 전차를 도하시켜 영등포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3사단은 신사리, 말죽거리, 판교로 진출하였다.[6]

책임 소재 편집

지금까지도 정확한 책임 소재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한강 인도교 등 한강교 폭파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지시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참모부장 김백일, 장경근 국방차관. 이범석 총리[7] 등 관련된 사람이 많다.

최창식 공병감의 고문이었던 미군 크로포드 소령은 "당시 폭파명령을 내린 것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의 고문으로 있던 미군 장교"라고 증언했다. 당시 지휘계통상 채병덕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던 사람은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다.[8]

최창식 공병감은 1962년부터 재심 과정을 거쳐 1964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9]

논란 편집

각주 편집

  1.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p. 82 (Joseph C. Goulden, 1982년)
  2. '한국전쟁사 제1권' p. 85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77년)
  3. 대한민국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2, 255쪽: "27일 자정을 전후하여 북한군 전차대가 길음교로 밀려들었고, 미아리 저지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 면서 서울 포기 결정과 함께 한강교 폭파라는 사건이 발생하 게 되었다.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들을 통해 이 경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고 서울 시내 일각에 적의 전차가 나타난 시각은 새벽 1시 45분경. 이 시간에 돈암동에서 급히 육본으로 달려온 강문봉 대령은 채총장에게 “적의 전차가 시내에 침입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때의 상황은 분명치 않으나, 강대령의 보고를 받은 채총장이 즉시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어 한강교 폭파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4)"
  4. 대한민국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2, 255쪽: "그 직후 채총장은 참모들의 권유에 의해 육군본부를 출발하 여 한강대교를 넘어갔다. 김백일 대령은 자신이 뒷일을 맡기 로 하고, 강영훈 대령을 총참모장의 수행원으로 지명하여 함 께 동행하게 하였다. 육본에는 김 대령 외에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 작전교육국장 장창국 대령, 군수국장 양국진 대령, 그리고 신임 인사국장 신상철 대령 등이 남았다."
  5. Appleman 1992, 32쪽: "About midnight Colonel Wright ordered some of the KMAG officers to go to their quarters and get a little rest. One of these was Lt. Col. Walter Greenwood, Jr., Deputy Chief of Staff, KMAG. Soon after he had gone to bed, according to Colonel Greenwood, Maj. George R. Sedberry, Jr., the G-3 adviser to the ROK Army, telephoned him that the South Koreans intended to blow the Han River bridges. Sedberry said that he was trying to persuade General Kim Paik Il, ROK Deputy Chief of Staff, to prevent the blowing of the bridges until troops, supplies, and equipment clogging the streets of Seoul could be removed to the south side of the river. There had been an earlier agreement between KMAG and General Chae that the bridges would not be blown until enemy tanks reached the street on which the ROK Army headquarters was located. Greenwood hurried to the ROK Army headquarters. There General Kim told him that the Vice Minister of Defense had ordered the blowing of the bridges at 0130 and they must be blown at once." (자정 쯤 라이트 대령은 주한미군 간부들에게 야전사령부로 가 휴식을 취하라 말했다. 이들 중 한 명은 주한미군군사고문단(KMAG)의 수석차관을 지낸 월터 그린우드 주니어 중령이 있었다. 그가 잠들자마자 그린우드 중령과 조지 G-3 다중영역작전 고문관인 R. 세드베리 소장은 한국인들이 한강 대교를 폭파할 계획이라는 전화를 받았다. 세드베리는 병력과 보급품, 장비의 운송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을을 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 다리를 폭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석차관을 지낸 김백일 장군을 설득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KMAG와 채병덕 장군 간에 다리가 적의 전차가 한국군 사령부가 위치한 시내에 도달하기 전까지 다리를 폭파하지 않기로 미리 합의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린우드는 급하게 한국군 사령부로 가 김백일로부터 오전 1시 30분을 기해 다리가 한 번에 폭파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하달되었다고 말했다)
  6. 김장수 & 안병한 2006, 163쪽: "한강선을 파상적으로 도하 공격하던 북한군은 7월 3일 새벽 제4사단이 완파되 지 않은 한강철교를 보수하여 전차를 도하시킨 후 영등포 지역으로 공격하였으 며, 제3사단이 신사리-말죽거리-판교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7. 백사 이윤영 회고록 제I편 171~172쪽
  8. 김득중,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9. 14年(연)만의 冤罪(원죄) 漢江(한강)폭파한 崔大領(최대령)

참고 문헌 편집

같이 보기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