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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결교의 초창기 역사편집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편집

김상준, 정빈 양씨가 일본 동경에 있는 동양선교회의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1907년 조선 경성 종로 염곡(현재의 종로1가와 종로2가 사이)에 “조선 야소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하고 사중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이다.

1910년,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성결교회는 영국의 존 토마스 (John Thomas) 목사를 초대 감독으로 사업을 관장하여 지금의 무교동에 전도관을 개축하고 경성성서학원을 설립하는 발전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서 성결교단의 창립편집

1921년에 새로운 감독, 킬보른이 부임하면서 같은해 9월, 33개의 교회와 기도원을 통괄할 조직을 위하여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교단을 형성한다. 1922년부터 교단잡지인 활천을 발행하고 선교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1929년 연회가 창립할 때 75개 교회의 남녀교역자 200여명에 이른다.

나성의 창립편집

1936년 정남수 목사를 중심으로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에 이탈한 십여 개 교회와, 송태용 목사가 이끌고 있던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와 다름)와 연합하였다. 이들은 몇 년후인 1948년 미국의 나사렛교회와 연합하여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나성)를 창립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말과 해방 및 한국동란편집

그 후, 일제의 탄압으로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1943년 12월에 교단이 사실상에 강제해산을 당하며 380명의 교인이 순교하였다. 그러나 광복으로 인하여 1945년 9월 재건총회가 열리고 1949년 4월 교단명칭을 기독교조선성결교회에서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개정한다. 1947년에 의회제도로 개정하고 KNCC에 회원교단으로 되는 업적을 보이나 한국동란으로 인해서 155명의 교인이 순교하고 다수의 목회자가 납북당한 가운데 교단이 사실상 와해될 위기에서 교인들이 힘을 모아 교회를 재건해 한국 교회사의 기적으로 새겨지게 된다.

기성예성의 분열 및 합동편집

이미 NCC에 가입되어 있었던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1955년에 한국복음동지회(NAE (한기총의 전신))에도 가입하지만, 이에 대한 교단내 논란은 끊임이 없었고, 결국 1961년에 개최되었던 제 16대 총회에서 에큐메니즘(교회연합운동)의 지지와 반대를 놓고 반대파들과 중립파들이 NCC와 NAE 둘 모두에게 가입한 총회에게 각성을 요구하며 따로 독립하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을 세워 한국의 성결교는 양분되고 말았다. 그러나,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에서 NCC, NAE의 두 단체 탈퇴 등의 통합을 중요한 조치가 이루어지자, 이에 고무된 예성의 많은 교회들이 1965년 기성으로 이동하여 1차 통합을 이루게 된다. 이후 1973년 예성의 97개의 교회들이 기성으로 이동하여 2차 통합을 이루게 되었지만, 아직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기성, 예성, 나성의 현 모습편집

기성은 기본적으로 알미니안주의웨슬리예지예정사중복음(순복음)에 진보적인 학풍 중 자유주의는 배격하나 신정통주의가 일부 추가된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근래 기성에서 다시 NCCK에 재가입하려고 했으나 기성 교단 내에서 반대하는 목회자들이 많아서 무산되었다. 기성은 이천 구백 개에 달하는 교회당과 약 오천명의 목회자를 보유하고 있다.

예성은 정통 성결교 신학인 웨슬리알미니안예지예정사중복음만을 고수하며 진보적인 학풍에 속한 신정통주의자유주의를 배격하는 등, 보수적인 ICCC(국제기독교총연합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현재 각 교단의 자료에 의하여서 예성은 약 일천개의 교회당과 천 팔백여명에 달하는 목회자를 보유하고 있다.

나성2002년 3월 나사렛교회의 한국총회를 통해 5개 연회가 하나로 통합되었고, 2006년 3월 14일 한국총회에서 11개의 지방회가 6개 지방회로 개편되었다. 개편된 지방회는 서울지방회, 경동지방회, 경기남지방회, 평안지방회, 호서지방회, 남부지방회로 총회 산하 290여 지교회가 있다.

기성, 예성, 나성 세 교단 모두 한국교회연합에 가입하고 있다.

함께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