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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설(韓圭卨, 1856년[1][2] 2월 29일 ~ 1930년 9월 22일)은 구한말 시대의 무관 겸 정치가이다. 는 강석(江石), 는 순우(舜佑)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한규설
韓圭卨
한규설.jpg
대한제국 의정부 참정대신
겸 영의정총수상 직무대리
(前 大韓帝國 議政府 參政大臣
兼 領議政總首相 職務代理)
임기 1905년 10월 31일 ~ 1910년 8월 21일
군주 고종 이형
순종 이척
섭정 황태자 이척
의친왕 이강
소네 아라스케
데라우치 마사타케
야마가타 이사부로
신상정보
출생일 1856년 2월 29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일 1930년 9월 22일(1930-09-22) (74세)
사망지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사택 별저에서 병사 후 경기도 고양에 유해 안장
거주지 조선 한성부
대한제국 한성부
일제 강점기 경성부
일제 강점기 경기도 고양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본관 청주(淸州)
학력 1884년 무과 급제
경력 前 조선 의정부 찬성
前 조선 우의정 직무대리 겸 좌의정 직무대리
前 조선 영의정 직무대행 서리
정당 무소속
부모 한승렬(부)
형제 한규직(형)

1880년음서로 문관 하급 관료 직에 천거되어 1884년에 무과 급제한 이후 사복시 장위사 시절 동료 사복시 주부 이기동, 홍문관 부수찬 이도재, 성균관 예하 강독관 신태유, 어윤적, 이병무, 이재극 등과 함께 갑신정변 진압 관련 작전에 간접성 참전키도 한 그는 갑신정변 당시 정변 진압군 핵심형 중심 간부로 참전한 친형 한규직이 전사하는 사태를 목도하였고 그 훗날 의정부 찬성 등을 거쳐 1905년의정부 참정을 역임하였다. 그 해 일본의 전권 대사인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여러 대신들에게 을사조약 체결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한규설은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어 한일병탄 때에는 일본 정부에 의해서 남작이라는 작위가 내려졌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일본인들이 차라리 그를 구슬리어 보려고 했지만 결국 헛일이 되었다.

친구 이봉의가 병석에 누워있고 그 아들이 와서 한일병탄 때 주는 관작을 받아야 되느냐고 물었을 때, 나라에서 주는 것이니 차라리 그냥 받으라 하고, 자신은 작위를 사퇴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이봉의 집안과 절교하게 된다.

목차

생애편집

1880년 음서 천거 후 1884년에 무과 급제하여 사복시 장위사 시절 갑신정변 진압 관련 작전에 참전키도 한 그는 그 훗날 1892년 한성 포도청 우변관아 포도대장·1896년 의정부 찬성 등을 지냈다. 그 후 1905년에는 의정부 참정에 제수되어 같은 해 의정부 참정으로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 해 일본의 전권대사인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여러 대신들에게 을사조약 체결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이에 끝까지 반대하였다. 한때 고종 치세기에 잠시 우의정 직무대리 겸 좌의정 직무대리를 거쳐 영의정 직무대행 서리를 지내기도 했다.

이어 경술국치 때 일본 정부에 의해서 남작 작위가 수여되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이후 칩거 생활을 하다가 1920년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하였으며, 1920년대 초에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여 이상재, 윤치소 등과 민립대학 설립운동 발기인의 한사람이 되었다.[3] 그 뒤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켰다.

이봉의 가문과의 관계편집

한규설의 가문과 이봉의의 가문은 대대로 친분관계를 쌓고, 가까이 지내다가 한일합방 이후 작위를 받는 문제를 놓고 원수가 된다. 이봉의 집안과 당대 한성부의 양반집에 대한 내력을 알던 신익희는 후일 이를 증언하였다.

"포,훈,영(어영),금 등 각청 대장을 역임하고 승지 판돈녕에 군호까지 받았을테니까 일본한국을 강제로 합병한 뒤에는 논공갱항을 하는 마당에 이봉의는 당연직 해당자[4] 가 된 셈이다.

일본 총독이 수작(受爵[5]) 승인서를 내밀고 도장 찍기를 강요하니까 그 아들 이직각(李直閣, 이봉의의 아들 이기원은 규장각 직각이었다.)이 한규설을 찾아가서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문의하였다.[6]

그 아버지 이봉의가 우포장(右捕將)으로 있을 때 한규설은 좌포장(右捕將)으로 있었을 뿐만 아니라 두 분 사이는 막역한 친분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찾아가 만나게 되면 '제 엄친께서는 환후중에 계시고 제가 이 일(일본이 작위 주는 일)을 판단해야 하겠는데, 어찌해야 할 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아서 이렇게 와 뵙고 어떻게 해야 옳을지 여쭙는 터이오니 하교해 주십시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을사 5조약 늑체 때 끝까지 반대했던 참정 대신 한규설이 서슴치 않고 '받으라는 것 받게 그려'하였다. 그래서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을 존장[6] 어른의 말씀도 있고 하여 마지 못해 도장 찍고 작을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나온 발표를 보니까 그분 한규설씨는 수작을 끝내 거부하였다. 그래서 두 집 사이에 그로부터 척지고 원한을 품은 채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다.[7]

한규설의 가문과 이봉의의 가문은 대대로 친분관계를 쌓고, 가까이 지냈지만 이 일로 훗날 이봉의 후손들은 절교를 선언하고, 이봉의 집안과 원수가 된다.

사후편집

한규설 선생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에 있다. 1986년 6월 16일 고양시의 향토유적 제25호로 지정되었다.

가족편집

  • 아버지 : 한승렬(韓承烈)
    • 형님 : 한규직(韓圭稷)
    • 동생 : 한진호 - 청송 심씨, 심규섭에게 출가
      • 장남 : 한양호(韓亮鎬, 현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설립자)
      • 자부 : 연일 정씨
        • 손자 : 한학수(韓學수 문양학사 이사장)
      • 장녀 : 안동 권씨, 권영덕에게 출가
      • 차녀 : 풍양 조씨, 조만구에게 출가

평가편집

함께 보기편집

기타편집

한규설을 연기한 배우편집

각주편집

  1. 한규설의 생년은 1848년설도 있으나 여기서는 청주한씨의 족보를 바탕으로 한『참정대신 강석 한규설 선생 전기』(黃沍根 저, 한국자료문화자료연구소, 1991)에 의한다.
  2. “『承旨先生案』(奎9731)”. 2016년 3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9월 20일에 확인함. 
  3.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이이화, 한길사, 2006) 290페이지
  4. 한국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조선총독부는 종2품 이상에게는 의무적으로 작위를 부여하자고 건의하여 일본 황실의 승인을 얻었다.
  5. 작위 수여
  6. 신창현, 《내가 모신 해공 신익희 선생》 (해공신익희선생기념회, 1989) 754페이지
  7. 신창현, 《내가 모신 해공 신익희 선생》 (해공신익희선생기념회, 1989) 755페이지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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