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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악(韓基岳, 1898년 1월 14일 ~ 1941년 6월 2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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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강원도 원성(原城)(현재의 원주) 출신. 1919년 일본 도쿄에서 기독청년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했고, 3·1운동때에는 임규, 심영택(沈英澤) 등과 독립선언서를 유인하여 각계에 배포하는 등[1] 활약하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1919년 4월 13일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4월 22일경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2회 회의에서 남형우(南亨祐), 김응섭(金應燮)과 함께 임시정부 법무부 위원 3인 중 1인으로 선임되어[2] 활동하였다. 1920년 초 귀국하여 중앙학교에 근무하다가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였으며, 1921년 11월부터 편집기자, 1924년 12월부터 1925년 3월까지는 편집국장 대리로 민족언론 창달에 전념하였다.

한편 동아일보에 근무하면서 1920년 7월에는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를 조직하고 오상근(吳祥根)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였으며, 그는 서무를 담당하여 청년운동을 벌였다. 1921년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정기총회에서 61인의 대표자 중 한사람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1925년 동아일보에서 나온 그는 시대일보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동년 10월에는 민족의 자립자활을 목표로 하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선전부 이사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는 바, 이 회에서는 1927년 2월 13일 기관지 "자활(自活)"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1926년 3월에는 교육이 민족을 살리는 가장 효과적인 사업이라고 판단하고 민립대학(民立大學)기성회를 조직하여 이종린, 박승철(朴勝喆), 최원순(崔元淳), 안재홍 등과 함께 대학 건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초에는 민족단일과 민족협동을 표방하며 사회주의민족주의를 망라한 민족 유일 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는데, 그는 동년 2월 15일 YMCA에서 안재홍, 신석우(申錫雨), 김준연, 이상재, 홍명희, 문일평(文一平), 한용운 등과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그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1년 5월 이 회가 해체될 때까지 구국운동을 벌였다.

1928년부터 1932년 4월까지는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으로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1935년부터는 다시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41년 6월 20일 학교 사택에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가족 관계편집

참고 자료편집

  • 한국사회 혼맥(네이버 카페)
  • 한기악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 한국의 명문가문 제 10편 "김성수가" 《서프라이즈》(2005.10.10.)
  • 조선민족운동연감 7·8·9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43면
  • 고등경찰요사 49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6·17·18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391·402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7·36·37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42·43·44면
  • 동아일보(1921. 11. 17, 11. 20, 1927. 1. 19, 1. 20)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62·17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4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46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752·753·754·97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9·142·144·14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209·30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115·292·293·358·464·609면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