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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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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韓信, ? ~ 기원전 196년)은 전한의 장군이자 제후이다. 동해군 회음현(지금의 화이안 시 화이인 구)[1] 사람이다. 고제 유방의 부하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유방의 패권을 결정지었다. 한초삼걸(漢初三傑) 중 하나로 꼽히며, 소하가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고 일컬은 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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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Hán Xìn.jpg
지위
제나라의 왕
재위 기원전 203년 ~ 기원전 202년
전임자 전광
후임자 유비
초나라의 왕
재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201년
전임자 항우
후임자 유교
회음현의 후작
재위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96년
신상정보
출생일 불명
사망일 기원전 196년
사망지 전한 수도 장안 장락궁

목차

생애편집

평민 출신으로, 가난하고 품행이 좋지 못해 관리로 천거되지도 못하고, 생업을 꾸려나가며 장사를 하지도 못해, 항상 남의 집에 붙어먹으며 살아 많은 사람들이 싫어했다. 회음현의 속향 하향(下鄕)의 남창정장(南昌亭長)에게 몇 달 간 기식했는데, 정장 아내가 이걸 싫어해 하루는 일찍 아침밥을 차리고 미리 식사해, 식사 때가 돼 한신이 찾아오니 밥이 없었다. 한신은 그 속셈을 알아채고, 분노해 그곳을 떠났다.

성 아래에서 낚시질을 하는데, 굶고 있는 모습이 그곳에서 빨래하는 여자 중 하나에게 띄어 그가 주는 밥을 받아먹고 “훗날 부인에게 반드시 많이 보답하겠소.”라 답했다. 그 부인은 노해 말했다. “사내자식이 스스로 밥도 못 먹고 다니기에, 왕손[2] 이 불쌍해서 밥을 좀 줬기로서니, 어찌 보답을 바라겠느냐?”

성 내의 무뢰배 젊은이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한신을 비웃으며, “죽음을 각오할 수 있으면 그 칼로 나를 찔러라. 못 하겠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나와라!” 라고 모욕을 주었다. 한신은 그 사람을 한 번 보고는 허리를 굽혀 그 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갔다{과하지욕(袴下之辱)}. 그래서 그 시장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웃으며 겁쟁이로 여겼다.

이후 항량이 거병해 회수를 넘어 북상하자 칼을 차고 그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항량이 장한과 싸우다 죽자 항우의 밑에서 낭중(郞中)이 되어 자주 간언했다. 그러나 항우는 그 책략을 쓰지 않았다. 기원전 206년, 진나라를 멸한 항우가 천하를 나누고 유방을 한왕으로 봉해 촉으로 처넣자 초나라를 떠나 한나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연오(連敖)[3] 가 되었다가, 법에 걸려 참형에 처해졌다. 동료 13명이 모두 처형되고, 자신 차례가 되었을 때, 등공 하후영을 만나 말했다. “전하께선 천하를 가지고 싶지 않습니까? 어찌 장사를 베리이까?” 하후영은 그 말을 특이하게 여기고, 그 행색이 건장함을 보고, 풀어주고 대화한 후 기꺼이 유방에게 천거해 치속도위(治粟都尉)가 됐으나, 아직 유방에게서 인정받지는 못했다. 한신은 한나라 승상인 소하와 자주 대화했고, 소하에게서 드디어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드디어 한왕 일행은 관중을 떠나 한나라의 서울 남정으로 출발했는데, 도망치는 장수들이 수십 명이었다. 한신은 소하가 자신을 유방에게 자주 천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달아났다. 이를 들은 소하는 미처 유방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한신을 쫓아가 데려왔고, 소하가 달아난 줄 알고 손발을 잃었다고 여긴 유방은 돌아온 소하를 꾸짖었다. 이에 소하는 유방에게 한신은 국사무쌍(國士無雙) 곧 나라에 비견할 자가 없는 선비며, 한중에서 계속 왕노릇 할 거라면야 굳이 한신을 쓸 필요는 없지만 천하를 다투고자 한다면 한신이 꼭 필요하다고 천거했다. 유방은 처음에 한신을 장군으로 쓰겠다고 했지만, 소하가 한신이 그러면 달아날 것이라 해 대장군으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유방이 즉시 한신을 불러 임명하려 하니, 소하는 그런 무례한 태도로는 안 된다고 해 좋은 날짜를 잡고 목욕재계하고 단을 쌓고 예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유방은 그대로 했고, 모든 장수들은 자기가 대장군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기뻐했는데, 막상 한신이 대장군이 되니 모두 경악했다.

예식이 끝난 후 유방에게 계책을 자문받자, 유방의 적은 항우임을 확인하고 항우의 약점을 일장 연설했다.

  • 첫째, 항우는 용맹하지만 현능한 장수에게 임무를 맡기지 못하니 이것은 필부의 용맹(필부지용)일 뿐이다.
  • 둘째, 항우는 남을 공경하며 자애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울며 음식을 나누지만, 정작 공을 세운 사람에게 작위를 줄 때에는 도장이 닳도록 망설이니 이른바 부인의 어짊(부인지인)일 뿐이다.
  • 셋째, 천하를 아우르면서 관중이 아니라 팽성에 도읍을 두었다.
  • 넷째, 의제와 약속을 어기고 친애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니 제후들이 불평한다.
  • 다섯째, 제후들에게 자기 주인 의제를 강남으로 내쫓은 것을 보여줘, 그들이 제 주인을 내쫓고 좋은 땅에서 왕노릇하게 했다.
  • 여섯째, 가는 곳마다 학살하므로 사람들이 원망하고 가까이하지 않으며, 무서워서 그 위세에 눌렸을 뿐이니, 패자라 하나 실은 인심을 잃었다.

그리고 항우가 관중을 셋으로 나누어 왕노릇하게 한 옛 진나라 장수 옹왕 장한,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들을 따라다니며 전사한 진나라 사람이 적지 않으며, 또 항우가 그들을 따르다 함께 항복한 20만 장졸을 다 죽이고 그들만 살렸으므로 진나라 사람들의 원망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러므로 진나라 사람은 초나라의 위세에 눌려 그들을 왕으로 섬길 뿐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 반면 유방은 관중에서 함부로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완화해 진나라 사람들의 인망을 샀다. 또 의제의 약속에 따라 가장 먼저 관중에 들어간 유방이 마땅히 왕이 되어야 함을 관중 사람들도 알았는데 항우가 강제로 못 하게 했으므로 진나라 사람들은 다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쪽으로 나아간다면 삼진은 격문만으로도 평정할 수 있다.

유방은 한신의 제안을 기뻐해, 한신의 계책에 따라 즉시 삼진을 칠 장군들의 부서를 정했다.

8월, 유방은 한신의 계책대로 고도(故道)[4] 를 따라 돌아와 옹나라 왕 장한을 쳤다. 장한은 진창, 호치에서 연이어 패퇴해 폐구로 달아났다. 한왕 2년(기원전 205년),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 하남왕 신양이 모두 항복했다. 왕흡과 설구는 무관을 나와 남양의 왕릉과 합류해 패에 있는 유방의 가족들을 데려오게 하니, 항우가 새로 세운 한(韓)나라 왕 정창(鄭昌)이 저항했다. 유방은 한나라 왕족으로 한나라 태위를 맡은 한신을 시켜 정창을 무찌르고 대신 한왕으로 삼았다. 3월, 임진에 이르자 서위왕 위표가 나와서 항복했고, 은왕 사마앙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삼진과 함곡관 밖의 하남, 한, 은을 평정했다. 그리고 조나라, 제나라의 도움까지 얻어 초나라로 진격해, 4월에 팽성에 이르렀으나 항우의 반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져 돌아갔다(팽성 전투). 한신은 이 패잔병들을 모아 유방과 합류하고, 경과 색 사이에서 초나라의 추격군을 격퇴해 초나라가 더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게 했다.

초한전 최후의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제압하면서 세운 큰 공을 인정받아 제왕(齊王)에 이어 초왕(楚王)이 되었으나 한(漢)의 권력이 확립되자 유씨 외의 다른 제왕과 함께 차차 밀려나 회음후(淮陰侯)로 격하되었다.

이 때 한신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한탄하였는데,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구천의 신하인 범려(范蠡)에게서 유래한 고사성어인,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유명해졌다.

기원전 197년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을 토벌하러 간 유방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진희의 난을 모의한 것이 가신의 밀고로 여태후에게 발각되어 장락궁으로 소환되어 참수에 처해지고 삼족이 멸족 당하였다.[5]

업적편집

한 3걸 중 1인으로써 대원수,초왕,회음후 올랐으며,소하가 천거한 국사무쌍 이라 불렸다.

대원수에 임명된 후에는 별동대를 이끌고 항우의 아군인 위, 은, 초, 대, 연, 제를 평정했고, 해하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하는 대업적을남겼다.

토사구팽편집

[果若人言 狡兎死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사람들이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영리한 사냥개는 삶겨지고, 날던 새가 떨어지면 잘 드는 활은 광에 들어가고, 적국을 깨뜨리면 모신은 죽는다'라고 하던데, 정말 그렇구나. 이미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는 삶기어 마땅하다.”

고사성어인 토사구팽은 한신 덕분에 유명해졌으나 한신이 태어나기 이전인 춘추전국시대 (越) 왕 구천의 신하인 범려(范蠡)가 오(吳)를 멸하고서 구천의 심중을 꿰뚫어보고서 관직을 내놓으면서 문종(文種)에게 함께 물러나자고 권하면서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범려는 초야에 숨어 화를 면하였으나 문종은 구천에게 충성을 다하다 트집을 잡혀 자결한다. 한신은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이 고사를 인용한다. 『사기』「회음후열전」에 나오는 기사다.

제1대 전한의 제왕
기원전 203년 ~ 기원전 202년
후임
(폐지)
(1년 후) 제도혜왕 유비
제1대 전한의 초왕
기원전 202년 ~ 기원전 201년
후임
초원왕 유교
제1대 전한의 회음후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96년
후임
(폐지)
보장군?

각주편집

  1. 진나라의 행정구역 기준으로 회음현은 동해군에 속한다. 한신이 초왕에서 쫓겨난 직후 동해군이 동해군과 동양군으로 분할된 뒤에는 동양군에 속하며, 한신 사후 79년 후인 기원전 117년에 광릉군(동양군의 새 이름)이 임회군과 광릉국으로 분할돼, 전한 멸망까지 임회군에 속한다.
  2. 진짜 왕의 자손이라는 게 아니라, 왕손이나 공자처럼 사람이 귀해 보인다는 말이다.
  3. 사기 삼가주에서 서광은 전객(典客)이라 했고, 이기는 초나라 관직 이름이라 했고, 장안은 사마라 했다.
  4. 농서군의 속현.
  5. 사마천: 《사기》 권92 회음후열전제32  중국어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사기 권92 회음후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