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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관계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여러 민족들이 세운 당나라 등과 문화, 무역 교류를 한 것으로 시작하며 고려는 이민족이 세운 국가들과 중국인이 세운 송나라와 무역을 하였다. 무역을 통해 서로의 문물을 교환하였다. 고려는 명나라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며(위화도 회군) 조선은 청나라를 정벌하려고도 하였다.(북벌) 조선의 외교정책 중에 하나로는 명나라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대해서 사대 정책을 취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대중국 외교는 중화민국국공 내전에서 패배하면서 타이완 일원으로 제한되었다. 1980년대 말에 돼서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유롭게 상호 방문을 허락하여 상호 간의 학술, 언론 등이 교류하였고 재중동포들이 동포 비자로 대한민국에 방문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에 경제 원조를 하고 상호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업들도 시행되었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은 1992년 8월부터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게 되었다.

목차

삼국 시대 이전편집

기원전 3세기 말, 부여는 현재의 지린 성 창춘 시를 중심으로 랴오닝 성, 헤이룽장 성 일대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부여는 서쪽으로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는 오환과, 그 이후인 기원전 1세기부터 5세기까지는 선비(鮮卑)과 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반도 남서부에 있던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1] 고조선은 멸망하고 (기원전 108년) 한나라는 북쪽 지역에 낙랑군 · 진번군 · 임둔군 · 현도군의 4군을 설치하였다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은 몇 세기 지나지 않아 멸망하였고 평양 부근에 한사군만이 남아있었으나 평양 사람들 반발이 심하여 평양의 민(民)들을 수장으로 세우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한사군을 멸망시킨다.

삼국 시대편집

372년 전진의 황제 부견(苻堅)으로부터 승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2]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374년에는 아도(阿道)가 전진에서 건너와[3] 불도를 고구려에 전하였다. 소수림왕은 375년에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고 순도를 머물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를 머물게 하여[4] 불교의 수용 및 보급 정책을 취하여, 전진(前秦)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 호국사상으로 삼았다.(→전진, 고구려) 중국에서 비롯한 유교 사상은 이미 삼국시대에 오경사상(五經思想)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이념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유교) 백제는 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의 각국과 활발하게 문화를 교류했다. 양나라에는 사신을 보내어 불교 등의 경서와 모시박사·공장·화사를 청하는 등 문화수용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신라의 교역은 주로 상업이나 외교 활동과 관계가 있었다. 676년의 삼국 통일 후 평화가 계속되며 생산이 늘었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당나라는 신라의 주 교역 상대였다. 신라는 당나라에 비단, 마포, 금, 은, 인삼, 약재, 말, 모피, 공예를 수출했고, 비단, 약재, 공예, 서적을 수입했다.

고려와 송나라편집

고려는 정치적으로 송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북방 이민족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또한 양국은 빈번한 교역을 통해 서로의 문물을 교환하였다. 고려가 송나라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주로 귀족들의 애호품인 능견(綾絹)·자기·약재·악기·향료·문방구(종이·붓·먹) 등이었다. 이 중에서 특히 자기·서적은 각각 고려의 청자와 목판인쇄술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나, 그밖에 다른 물품 수입은 귀족의 사치풍조를 더욱 조장시켰다. 고려의 수출품으로는 금·은·구리·인삼·송자(松子)·모피 등의 원산품과 능라(綾羅)·저마포·백지(닥나무 종이)·금은동기·부채·금은장도, 그밖에 종이·붓·먹 등 가공품이 많았다. 하지만 북방 이민족들의 정복왕조가 중국을 지배하면서 고려와 송나라의 무역을 단절되었다.

조선과 명나라, 청나라편집

조선 시대의 외교 정책 중에 하나로는 명나라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취하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전부터 친명정책을 표방하였으며, 개국하게 되어서는 즉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새 왕조의 승인을 알리고 국호는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和寧)·조선이라는 국호를 알리고 조선이란 국호를 추천을 받아 사용하였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란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의 금인(金印)을 받아 정식으로 왕에 책봉된 것은 1401년(태종 1)에 이르러서였다.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정조사(正祖使)·동지사(冬至使) 등 정기적인 사행(使行) 및 그 때 그 때의 필요에 따라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형식적으로 정치적인 제후국이였지만 이는 조선과 명나라의 전쟁을 막기 위한 것으로 조선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완전히 독립국가였으며 조선의 왕들도 "조", "종" 등 황제들이 쓰는 직책을 사용하였다.[5]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는 원병을 보내어 일본군을 격퇴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만주족들이 중국인들을 정벌하고 청나라가 세워지자 조선은 청나라를 정벌하려고도 하였다.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편집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는 원병을 보내어 주었는데 이는 현재에 와서 밝혀진바 중국의 원병은 조선을 도와주지 않고 일본, 조선 두나라의 전쟁상황을 중국이 개입하여 일본에 대한 견제를 하기 위함이였지 조선을 위한 일은 아니였다. 그 당시 명나라는 내부갈등으로 인한 혼란과 국려의 약화로 인해 만주 지방에서는 누루하치가 나라를 세워 국호를 후금이라 하고 명나라의 변경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에 광해군은 명나라의 원병 요청을 받고 군대를 보냈으나 명나라의 주력부대와 함께 싸움에 지고 말았다. 이때도 도원수(都元帥) 강홍립은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여 조선이 부득이 원병을 보내게 된 사실을 말하여 두 나라 사이에 별 일은 없었다.

그 뒤 만주족의 후금을 중국인들을 대대적으로 유린하며 세력을 떨쳤는데 국내에선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쓰자, 후금은 명을 치기위해서는 먼저 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 하여 군대를 내어 쳐들어오니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이에 조선에서는 형제의 의를 맺었다. 그 뒤 여진족의 후금은 중국을 유린하며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淸)으로 고쳤으며, 조선에 대해서는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청나라는 조선을 공격하였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정치적으로 간섭되지는 않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 일컫는다.[5]

청일 전쟁 이전편집

조선병자호란에서 대패한 이후에도 청나라는 사대하는 문제에 대해서 반대가 심하여 국론(國論)이 일치하지 않다가 청나라가 중국인들을 유린하고 정복하며 명나라를 멸하고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되자 표면상으로는 사대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청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은 군신 간에 여러 차례의 북벌계획(北伐計劃)이 논의되었을 정도로 깊었다. 하지만 무역을 시작하여 청나라의 문화와 청나라에 들어온 서양 문물이 한국에도 전래되어 실학사상을 일으키게 되었다.[5]

임오군란이 일어나(1886년 7월(음력 6월)) 일본을 배후에 두고 있던 민씨 일족이 몰락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자 청나라는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조선의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싸움에 개입하였다. 청나라는 마침 임오군란 당일인 7월 24일(음력 6월 10일) 지방으로 도망갔던 명성황후와 그 일족이 개화파 관료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을 청나라로 보내 청나라에게 원조를 요청한 것(음력 6월 19일)을 핑계로, 음력 6월 27일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육군 4,500명이 육로로, 8월 20일(음력 7월 7일) 청나라 해군 제독 오장경(吳長慶)이 정여창(丁汝昌), 김윤식을 대동하여 남양만으로 상륙해 조선에 진주하였다. 오장경은 8월 25일(음력 7월 12일) 흥선대원군을 병영으로 초청하였다가 군란 선동의 배후자라 하여 톈진(天津)으로 납치한다. 대원군 납치 후 다시 민씨 정권이 부활하였고, 청군은 8월 29일(음력 7월 16일) 왕십리이태원 일대를 공격하여 170여 명을 체포하고 11명을 사형시키는 등 군란 진압에 나섰다. 한편 일본으로 피신했던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병력 차이로 인해 대항하지는 못했다. 이때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 공사가 이끄는 일본군 대대 병력이 서울로 진주한 것은 음력 6월 29일이었다.(→임오군란)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임명하여 조선의 군대를 훈련시켰는데 이 또한 명성황후의 정권을 위한 것이였다. 또, 조선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경제적 침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때 유입된 청나라 상인들이 바로 재한중국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6]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그러나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청일 전쟁 이후편집

한편 청이 청일 전쟁에 졌고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위기를 느껴 고종을 황제로 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다.[5] 1897년 10월 12일, 고종의 조선왕조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1898년 8월 13일 청은 쉬서우펑(徐壽朋)을 대한제국 주재 공사로 파견했고, 4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대한제국도 이에 맞추어 1902년 10월 31일 박제순을 청국 주재 공사 즉, 주청전권공사(駐淸全權公使)로 파견했다.[7]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공식적으로 단교하였다. 1907년 일본 제국청나라 사이에 맺어진 간도 협약으로 한중 간의 영토 분쟁 지역이던 간도가 공식적으로 청나라로 편입되었다.

한국의 독립 운동과 중국편집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중화민국은 많은 군벌들을 혼란 속에서도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특히 장제스상하이 시에 거점을 두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중국 공산당 측에서도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가 및 단체를 지원하였다. 화북의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과 동맹이였다.

1945년 이후편집

1948년 대한민국중화민국을 승인하고 서로 수교하였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화민국과 수교하지 않고 있다가 국공 내전 이후에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적대적 관계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1992년까지 승인하지 않았고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1989년 5월소비에트 연방미하일 고르바초프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소 관계가 정상화되었고, 1989년 12월냉전의 종식이 선언되자, 1992년 8월 24일에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할 것을 발표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50년대 이래로 곧줄, 중화민국과의 관계는 맺지 않은 채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김부식 (1145) 혁거세 거서간 조(條) "[...]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 ([..] 중국에서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
  2.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二年 夏六月 秦王苻堅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3.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四年 僧阿道來 
  4.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五年 春二月...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5.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중국과의 관계
  6. 박상순, 〈在韓中國人의 法的地位에 관한 硏究 : 臺灣系中國人을 中心으로인천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01) v쪽. “재한중국인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국인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유입된 것은 1882년 임오군란이후의 일이다. 민씨 정권은 임오군란에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청나라에 의지하였다 이때 청나라 군인을 따라온 청국상인이 국내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재한중국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7. 박승준 (2010). 《한국과 중국 100년》. 서울: 기파랑. 11~12쪽. ISBN 978-89-91965-12-6. 한․중 수교 95년 전인 1897년 10월 12일, 19세기가 저물어가던 당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던 상황에서 고종의 조선왕조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그 다음 해인 8월 13일 청나라는 쉬서우펑(徐壽朋)을 대한제국 주재 공사로 임명했고, 4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대한제국도 1902년 10월 31일 박제순(朴齊純)을 청국 주재 공사로 파견했다.  및 이 책의 주석 楊軍 王秋彬, 《中國與朝鮮半島關係史論》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6, 197쪽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