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비 이씨

혜비 이씨(惠妃 李氏, 생년 미상 ~ 1408년 음력 2월 3일)는 고려 제31대 군주였던 공민왕의 제2비이다.
![]() 惠妃 李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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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 |
비 궁주 | |
재위 | 1359년 ~ 1374년 |
이름 | |
별호 | 불교 법명 호월(湖月) 강칭 혜화궁주(惠和宮主) |
시호 | 혜비(惠妃) |
신상정보 | |
출생일 | 생년 미상 |
출생지 | 고려 |
사망일 | 1408년 음력 2월 3일 |
사망지 | 조선 한양 정업원 |
왕조 | 고려 |
부친 | 이제현 |
모친 | 수춘국부인 박씨 |
배우자 | 공민왕 |
자녀 | 無 |
종교 | 불교 |
생애편집
가계편집
계림(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출신이다. 성리학자 이진의 손녀이며 계림부원군 이제현의 딸로, 이제현의 2번째 부인인 수춘국부인 박씨 소생[1]이다. 본관은 경주이다[2].
왕비 시절편집
공민왕의 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노국대장공주와 여러 재상들이 공민왕에게 명문가의 여식으로서 후비를 들일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이씨가 간택되어 1359년(공민왕 8년) 음력 4월 24일 왕비에 책봉되었다[3]. 그러나 막상 혜비가 들어오자 노국대장공주는 질투를 느끼고 음식을 들지 않기도 하였다[4].
1372년(공민왕 21년) 음력 10월, 공민왕은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뽑아 설치한 자제위 소속의 한안, 홍륜 등을 시켜 자신의 후비들을 강간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들이 생기면 그 아들을 자신의 소생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때 익비 한씨 등은 이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실제로 임신까지 하였으나[5], 혜비와 정비 안씨, 신비 염씨는 그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였다.
1374년(공민왕 23년) 공민왕이 시해된 후에는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6] 정업원(현재의 청룡사)으로 들어갔다[7]. 공민왕 사후에도 조정에서는 그녀를 비롯한 정비 안씨, 신비 염씨 등에게 계속 일용품을 지급하고 있었는데, 1388년(창왕 즉위년) 음력 12월 헌사에서 그녀들이 정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러한 일용품의 지급을 중단하고 세록[8]만 지급케 하도록 청하였다[9].
고려 멸망 후편집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혜화궁주(惠和宮主)로 불리었으며, 1408년(태종 8년) 음력 2월 3일 사망했다. 이때 태종은 쌀과 콩 30석, 종이 100권을 부의로 내렸다. 이때 혜비는 정업원의 주지로 있었는데, 그녀가 사망하자 의안대군(태조 이성계의 8남)의 처 심씨를 대신 주지로 삼았다[10].
그녀의 능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시호는 혜비(惠妃)이다. 남편 공민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가계편집
혜비 이씨가 등장한 작품편집
외부 링크편집
출처편집
-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 〈이제현묘지명〉항목
-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혜비〉항목”. 2016년 3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6월 6일에 확인함.
- ↑ 《고려사》권39〈세가〉권39 - 공민왕 8년 4월 - 이제현의 딸을 맞아 혜비로 책봉하다
- ↑ 《고려사》권89〈열전〉권2 - 노국대장공주
- ↑ 《고려사》권131〈열전〉권44 - 홍륜
- ↑ 《고려사》권89〈열전〉권2 - 혜비 이씨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정업원구기〉항목
- ↑ 1년을 기준으로 지급되는 녹읍따위를 말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녹읍〉항목 참고
- ↑ 《고려사》권137〈열전〉권50 - 창왕 즉위년 12월 - 헌사에서 혜비 등에 대한 일용품 지급을 중지하라고 건의하다
- ↑ 《조선왕조실록》태종 8년(1408) 2월 3일 1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