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산대첩

홍산대첩(鴻山大捷)은 고려우왕(禑王) 2년(1376년) 7월에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왜구를 격멸한 사건이다.

홍산대첩
전기 왜구의 일부
날짜1376년 7월
장소
고려 충청도(忠淸道) 부여군 홍산 (현재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결과 고려의 승리
교전국
Royal flag of Goryeo (Bong-gi).svg
Ashikaga mon.svg
지휘관
철원부원군: 최영(崔瑩)
박인계(朴仁桂)
최공철(崔公哲)
강영(康永)
박수년(朴壽年)
무로마치 왜구
병력
정확히 알 수 없음 전선 20척
피해 규모
박인계 전사(戰死) 전면 사망
왜군 격퇴

개요편집

고려 우왕 2년(1376년) 고려의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에서 왜구를 격파한 사건. 최무선진포 해전, 이성계황산대첩, 정지관음포 전투, 박위제1차 대마도 정벌 등과 함께 고려 말 왜구와의 전투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다만 전투의 규모도 작은데다 왜구의 침공 국면에 있어서 영향이 그렇게 큰 것은 아니라고 전해진다.

고려 말기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 폐단이 많았으며, 특히 1376년 7월에는 대규모의 왜구가 부여를 침공하고 공주까지 함락시켰다. 왜구가 또 석성을 침공하고, 연산의 개태사로 향했다. 이를 막기 위해 양광도의 원수 박인계(朴仁桂)가 군사를 이끌고 나섰으나, 패배하여 전사했다.

이에 최영이 나서서 왜구의 토벌을 자청하고 출정하여 양광도 도순문사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급히 홍산으로 갔다. 먼저 도달한 곳은 3면이 모두 절벽이고 길 하나만이 통하는 곳이어서 모든 장수들이 겁을 먹고 나서지 못했는데, 최영이 선두에 서서 정예부대를 동원, 진격하여 왜적을 대파했다.

이 전투는 1380년에 이성계(李成桂)·변안렬이 거둔 황산대첩, 1383년에 정지가 거둔 남해의 관음포전투 등과 함께, 고려 말기에 왜구를 크게 무찌른 대첩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인하여 최영은 철원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다른 장군과 병사들도 등분에 따라 상을 받았다.

내용편집

고려 우왕 2년(1376) 충남 부여 홍산 일대에서 고려군이 왜구를 대파한 전투이다.

1376년 7월 서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발호하던 왜구는 금강 상류를 거쳐 북상하여 공주를 공격하였다. 공주를 함락한 왜구는 연산현의 개태사를 향해 전진하면서 양광도원수 박인계가 이끄는 고려군을 격파하였고, 승기를 잡은 왜구는 홍산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판삼사사 최영을 박인계의 후임으로 출전하도록 하였고, 최영은 최공철·강영·박수년 등과 함께 고려군을 이끌고 홍산에 이르렀다. 홍산 일대는 삼면이 우뚝 솟은 절벽에 둘러싸여 오직 한 가닥의 길만 뚫려 있는 험준한 지형이었다.

왜구는 높은 지형에 의지하여 고려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영은 전군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으나, 모든 장수들이 겁을 먹고 전진하지 못하였다. 최영이 몸소 군사의 진두에 서서 정예병을 모두 동원하여 왜구의 진영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이때 숲 속에 매복해 있던 왜구가 쏜 화살이 최영의 입술을 명중시켜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최영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곧바로 적을 쏘아 이를 죽이고 난 뒤에야 박힌 화살을 뽑았다. 사기가 오른 장병들은 앞을 다투어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고, 이를 막지 못한 왜구는 무수히 많은 사상자를 내고 뿔뿔히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홍산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금강 연안의 내륙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왜구의 기도를 저지할 수 있었고, 양광도 지역 일대에 침입한 왜구의 세력을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싸움은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 등의 진포싸움,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 정지(鄭地)의 남해대첩과 함께 왜구토벌에서 가장 빛나는 전적 중 하나이다.

고려때 왜구 침범은 충정왕 때부터 시작되어 공민왕과 우왕 때 가장 창궐했는데, 특히 우왕 14년 동안 378회에 걸쳐 쳐들어와 최고를 기록하였다. 1376년 7월 왜구가 부여에 침입했다가 공주에 이르렀는데, 이 때 목사 김사혁(金斯革)이 정현(鼎峴)에서 싸우다가 패전해 공주가 함락되었다.

왜구는 다시 연산현(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개태사(開泰寺)로 쳐들어와 이를 맞아 싸우던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도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영은 출정을 자청하였다. 이 때 우왕은 그가 나이 들어 말렸으나, 최영은 종사와 왕실을 위해 굳이 출정하기를 거듭 요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최영이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홍산에 이르니 왜적이 먼저 험하고 좁은 곳에 웅거하고 있었다.

삼면이 모두 절벽이고 오직 한 길만이 통할 수 있었는데, 모든 장수가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못하자 최영이 앞장서서 예기(銳氣)로 돌격해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때 침입한 왜구의 수가 얼마인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공주와 개태사가 약탈당한 것으로 봐서 대규모의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왜구들은 늘 “우리가 두려워하는 자는 백발(白髮)의 최만호(崔萬戶)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최영을 두려워하였다. 이후 왜구의 기세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때 전공을 세운 최영에게는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이 내려지고, 다른 장수들에게도 차등 있게 벼슬이 제수되었다.

배경편집

우왕 2년(1376년) 7월 왜구가 20여 척의 함선으로 전라도 원수의 군영을 공격했고, 나주로 이동하며 고려군의 함선을 불태웠다. 마침 이 지역을 방어해야 할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 하을지(河乙沚)는 탄핵 당해[1] 류영(柳濚)[2]으로 교체되었는데 인수인계할 때까지는 방어 임무를 맡아야 했는데도 그냥 자기 농장이 있는 진주로 돌아가버려, 피해가 더욱 커졌다.[3]

부여군을 거쳐 공주까지 온 왜구[4]에 맞서 당시 공주 목사 김사혁(金斯革)은 정현(鼎峴)[5]에서 왜구를 막아세웠으나 패배하고(공주 역시 왜구에게 함락되고) 양광도원수 박인계(朴仁桂)는 회덕현(懷德縣)의 감무(監務) 서천부(徐天富)를 김사혁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죄를 물어 잡아 처형하고 자신이 왜구를 막기 위해 나섰으나, 현재의 연산(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개태사 부근에서 전투 도중에 말에서 떨어져 전사했다.

개전편집

고려군이 연이어 패배하고 왜구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사태의 심각성을 생각한 최영은 자신이 나서 왜구를 토벌하겠다고 우왕에게 허락을 구했다.

"보잘 것 없는 왜구들이 이처럼 방자하고 난폭하니, 지금 제압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다스리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다른 장수를 보내면 꼭 이길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으며, 군사들도 평소에 훈련되지 않은지라 전투에 투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늙었으나 종묘사직을 안정시키고 왕실을 보위하려는 뜻은 결코 쇠하지 않았으니, 빨리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놈들을 격퇴하게 허락하여 주소서." ─ 고려사 최영전

당초에 우왕은 최영이 나이가 많다고 허락하지 않으려 했지만,[6] 최영이 계속해서 출병을 요구하자 결국 승낙했고, 최영은 그 즉시 자지도 않고 출병했다.[7]

至鴻山, 瑩先據險隘, 三面皆絶壁, 唯一路可通.
홍산에 이르렀는데, 최영이 먼저 험준한 곳을 차지하여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였고 길 하나만이 겨우 통했다. ─ 고려사 최영열전
至鴻山, 倭先據險隘, 三面皆絶壁, 唯一路可通.
홍산에 이르렀는데, 왜가 먼저 험준한 곳을 차지하여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였고 길 하나만이 겨우 통했다. ─ 고려사절요

총사령관 최영과 양광도도순문사 최공철,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兵馬使) 박수년(朴壽年)이 이끄는 고려군이 홍산(鴻山)[8]에 도착했을 당시의 정세에 대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미묘하게 다른데, 왜구를 진압할 당시에 고려군이 험준한 곳에 진을 치고 왜구를 공격했는지 왜가 고려군을 막기 위해 험준한 곳에 진을 치고 고려군을 막은 것인지 서로 말이 다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절요가 맞고 고려사는 오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처럼 왜구는 험한 요지에 자리 잡고 있고, 삼면이 모두 절벽에 길이라고는 한 길 뿐이라 그 길로 진군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였다. 이에 최영이 직접 사졸들의 선봉에 서서 정예병을 이끌고 앞장서 돌격했고, 적들이 쓰러졌다.

이후 최영이 판사(判事) 박승길(朴承吉)을 보내 이를 보고하자 우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소식을 전한 박승길에게도 백금을 주고, 삼사우사(三司右使) 석문성(石文成)[9] 등을 보내 최영에게 재물을 주고는 의원 어백평(魚伯評) 등으로 하여금 약을 지어 최영을 치료하게 했다. 이후 최영이 개선하자 우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임진강에서 이를 맞이했다.

홍산대첩의 공을 논해 최영은 시중이 되었으나, 최영은 “시중이 되면 바깥으로 함부로 나가지 못할 텐데 왜구가 모두 평정되고 나면 받겠습니다.”라며 사양했고, 이에 철성부원군(鐵原府院君)으로 봉하였고, 이때 최영의 처조카인 전라도 원수 류영도 불러다 밀직부사상의(密直副使商議)를 삼았는데 이에 대해서 최영은 굳이 막지 않았다고 한다.[10]

참고 문헌편집

홍산대첩의 정확한 전과는 알수없는데 우왕은 술을 따라주면서 최영에게 "왜구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느냐." 고 물었지만 최영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고 대답했다. 이에 재상들이 다시 한 번 물어보았지만 최영은 또 적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적이 많았다면 이 늙은이가 살아 올 수 있었겠느냐."고 대답했다.

최영의 겸손이었을 수도 있지만, 홍산대첩이 벌어진 현장으로 비정되는 홍산 태왕산성을 답사한 이영 교수 등은 지형적인 여건을 볼 때 대규모 전투가 일어나기는 어려운 지형이라고 지적했다. 정상의 넓이가 150평 남짓으로 대규모 병력이 수용될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한다. 이곳의 지형은 고려사의 기록대로 삼면이 절벽에 가까운 경사를 이루고 정상까지 자동차 한 대 겨우 올라갈 폭의 길만 있으며 정상부 북쪽으로는 태봉산 줄기로 이어져 있는데, 이영은 고려군의 공격에 밀린 왜구들이 이 능선을 타고 해안 쪽으로 퇴각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11]

홍산대첩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왜구를 물리친 대승리였지만, 그전까지 왜구에 완전히 농락당하며 한반도 전역을 유린당하던 고려가,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육지에서 반격을 할 수 있게 된 신호탄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 왜구와의 싸움은 왜구가 여러 고을을 초토화하고 있어서, 지방의 병력이 힘겹게 버티다가 뒤늦게 도착한 정규군이 간신히 막아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육지에 상륙한 병력은 내지의 왜구와 연계하여 거대한 규모가 되었고, 개태사 전투에서 고려 관군이 무참하게 적에게 대패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산대첩은 왜구의 세력이 대거 집결하여 건너온 세력을 궤멸시킴으로써, 심리적으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혼란기의 마무리를 장식한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거의 국가 영웅을 대하듯 하는 최영에 대한 찬양은 장장 30여년간 왜구에 유린되어온 고려 조정의 심정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장기적으로 보았을때 왜구의 세가 약해지는 기점이 있었다. 물론 왜구는 어느 한순간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이후 황산대첩이 벌어진 후 즈음에도 침입 자체는 계속되었지만, 대함대를 동원했던 정규군 수준의 왜구의 힘은 분명히 지방 호족 정도의 활약으로 크게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도 홍산전투의 승리는 왜구의 공격에 있어 변화를 가져왔다.

이때 한 동자가 적중에서 도망쳐 돌아왔는데, 뭇 장수들이 적의 상황을 묻자 말하였다. “적들은 늘 말하기를 ‘두려워할 만 한 자는 머리가 허옇게 센 최 만호 뿐이다. 홍산 싸움에서 최 만호가 오니 사졸이 다투어 말을 타고 유린하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고 하였습니다.” ─ 고려사 최영열전

홍산대첩 이전에 최영이 본격적으로 왜구와 교전하고 구체적인 전승을 거둔 기록은 공민왕 7년(1357년)에 왜의 배 4백여 소가 오차포(吾叉浦)를 약탈하였을 때 복병을 숨겨두고 맞서 싸워 크게 이겼던 것이 유일하며, 공민왕 14년(1364년)에 왜구가 교동(喬桐) · 강화(江華)로 쳐들어와 세조[12]어진을 훔쳐가는[13][14] 사건이 터지자 당시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로써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계림윤으로 좌천되기도 했다.[15] 대부분은 북쪽에서 쳐들어온 홍건적이나 최유의 난 당시 덕흥군을 따라 고려를 공격한 원나라군, 제주도에서 세력을 떨치던 원나라 목호들이 최영의 상대였었다. 홍산 전투 당시 최영의 나이는 61세로, 총사령관으로써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다 왜구의 화살에 입술을 맞아 부상당했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바로 그 화살을 뽑아서 자기를 쏜 왜구를 쏴서 격퇴했다. 이 용맹한 모습은 고려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뿐 아니라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다 주어 왜구에 대한 적극적 공세를 취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러한 두려움은 이듬해 왜구에게 잡혀갔다 도망쳐 온 아이가 "고려에서 두려워할 것은 머리가 허옇게 센 최 만호"라고 말했다고 한 기록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이듬해 강화도의 왜구들이 양광도를 공격하고, 수원부사였던 박승직(朴承直)이 왕안덕, 인해, 홍인규 등 세 원수가 양광도를 구원하러 온다는 소식에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가 밭을 매는 자들에게 "원수들이 온다고 하는데 지금 어디에 있느냐." 고 물었고, 밭 매던 사람들은 "적이 이미 물러나 원수들이 쫓고 있다." 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 변장한 왜구들이었고, 이것을 모르고 속아 넘어간 박승직은 안성에 들어서자마자 왜구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군사를 잃었다. 왕안덕도 패배하면서 수원, 양성, 안성 부근의 고을들은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는 폐허가 되고 말았는데, 왜구의 포로 한 사람을 잡을 수 있었는데, 강화도의 왜구들이 양광도를 친 이유는 "양광도를 쳐서 최영을 양광도로 끌어내고, 그 사이에 비어있는 개경을 급습하려는 것." 이라는 경악스러운 계획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는 그만큼 최영이 왜구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홍산대첩이 일어났던 장소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는 최영을 모신 기봉사(奇峰祠)가 있다.[16]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고려사절요에는 "재주와 행실이 없고, 또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방이 있었다. 권력 있는 귀인에게 뇌물을 바쳐 외방의 중임을 얻으니, 사림(士林)들이 더럽게 여겼다."고 되어 있다.
  2. 최영의 처조카였다. 하을지 후임으로 있다가 패하기는 했지만 이후 낭산(朗山)ㆍ풍제(豐堤) 등 현(縣)을 침범한 왜구를 전주 목사 류실(柳實)과 함께 격퇴하고 왜구가 노략하였던 2백 필을 빼앗아 그 주인에게 돌려 주는 등의 공을 세우기도 했다.
  3. 패전 뒤 하을지는 하동군으로 유배당한다.
  4. 이들이 나주를 공격하고 북상한 왜구들인지 새로 등장한 왜구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그 기세가 상당히 강력했다.
  5.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정치리로 추정.
  6. 당시 최영은 60살
  7. 당시 왜구의 기세가 대단히 흉흉하여 "왜구가 곧 도성에 오려고 한다." 는 출처불명의 헛소문까지 퍼져 개경의 분위기는 흉흉했고, 조정에서도 군사를 풀어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왜구가 송악산으로 온다는 소문에 송악산의 승려들을 징발하여 병사로 삼아 대비하기까지 했다.
  8.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홍산초등학교 뒷산에 있는 태왕산성으로 비정된다.
  9. 홍산대첩 이듬해인 우왕 3년(1377년)에 왜구가 강화도에 쳐들어왔을 때 왜구들은 "막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이 진정 낙토로구나" 하며 마구 약탈하고 다닐 때 이를 막기 위한 회의 중에도 "여기 노래 잘 하는 기생 안 왔냐" 하는 그 사람을 말한다.
  10. 고려사절요에는 경복흥이인임ㆍ지윤이 정방제조(政房提調)로 있었는데, 지윤과 이인임이 종군도 하지 않는 사람한테까지 마음대로 벼슬을 주는 것을 경복흥이 막지 못한 것은 지윤과 이인임의 견제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11. 홍산·진포·황산 대첩의 역사 지리학적 고찰 中
  12. 태조 왕건의 아버지 왕융으로 후세에 세조 위무 대왕으로 추정.
  13. 여담으로 일본의 무라이 쇼스케는 이 세조를 (원나라) 쿠빌라이 칸으로 해석해 왜구는 그저 도적떼가 아니라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움직인 존재들이었다. 그 목적은 원이나 고려에 대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라기 보다는 일본의 남북조 동란에서 군자금으로 쓸 재물을 노린 것 뿐이라고 보았다.
  14. 이영 (잊혀진 전쟁, 왜구)
  15. 당시 권력자였던 신돈도 마찬가지 였다.
  16. 美來路 홍성 문화관광 전설/민속 사우 2014년 12월 17일 확인

참고 자료편집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시대사(高麗時代史)』(김상기, 동국문화사, 1961)
  • 「고려말기(高麗末期)의 왜구(倭寇)」(손홍렬,『사학지(史學志)』9, 1975)
  • 『日鮮關係史の硏究』上(中村榮考, 吉川弘文館,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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