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봉

황규봉(黃圭奉, 1953년 4월 24일 ~ 2016년 1월 18일)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였다.

황규봉
Hwang Kyu-Bong
Baseball pictogram.svg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53년 4월 24일(1953-04-24)
출신지 경상북도 성주군
사망일 2016년 1월 18일(2016-01-18) (62세)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1982년
드래프트 순위 원년 멤버
첫 출장 KBO / 1982년 3월 27일
동대문MBC
경력

선수 경력

코치 경력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아시아선수권 1973년 마닐라

경북고등학교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투수였고 정구왕 전 청보 외야수와 초등학교(성주) 동창이며[1] 중학교(성주중)도 같이 갔지만 두 선수(황규봉 정구왕) 모두 선수부족 탓인지 대구 경상중학교로 전학을 가는 과정에서 1년을 유급했다. 경북고등학교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실업 야구 팀인 한국화장품에 입단하여 1981년까지 몸담은 그는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에 따라 연고 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원년 멤버로 입단하였다. 프로 원년인 1982년에 최다 세이브(11세이브)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권영호, 이선희와 함께 15승(권영호 이선희 11선발승, 본인(황규봉) 7선발승)을 거두었다. 원년 멤버 중 한 명인 이만수는 내리막길에 접어들 시기에 10승을 넘게 기록해서 대단한 투수였다고 그를 추억했다.[2] 선수들 사이에서는 "황소"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선수층이 옅은 현실에서 무리한 투구를 한 탓인지[3] 다음 해 6승(5선발승)으로 추락했고 1984년 10승(4선발승)을 거쳐 1985년 14승(모두 선발)을 기록했으나 팔꿈치 부상 때문에[4] 3승(모두 선발)으로 추락했던 1986년까지 선수로 활동하고 은퇴한 그는 같은 해 11월 26일부터[5] 3년 계약 형식을 통해 삼성 라이온즈에서 역대 1호 프로선수 출신[6] 투수코치로 활동한 후 일본[7] 미국으로 건너가 지도자 연수를 받았으나, 귀국 후에는 아예 야구계를 떠나 개인 사업을 했는데 사생활 문제 때문에[8] 구단으로부터 미운털이 찍혔다. 게다가, 현역 은퇴 후 사업 실패로 인해 가족과의 불화가 겹치며 부산에서 홀로 지냈던 그는 대부분의 야구계 인사들과도 연락을 끊어서, 경상중학교 시절부터 같이 선수 생활을 해 왔던 이선희 외에는 그의 근황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하며 이 과정에서 사생활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본인의 삼성 2군 투수코치 이동을 요구한 편송언 사장과 1989년 삼성 감독으로 부임했던 정동진 감독 두 사람의 사이가 더욱 안 좋아졌고[9] 정동진 감독은 사생활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황규봉 1군 투수코치의 2군행을 요구한 편송언 사장과 마찰을 빚었던 것 외에도 1990년 한국시리즈 패퇴의 책임 탓인지[10] 1년 임기를 남겨둔 채[11] 1990년 말 감독직에서 물러났으며 본인(황규봉)의 부고 소식도 그의 매제와[12] 이선희를 통해 알려졌을 정도인 데다가, 부고가 알려진 시점에는 야구 팀들이 전지훈련을 떠나는 시기여서 빈소를 찾는 사람들이 적었다고 한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2015년 11월 허리 통증으로 인해 검진을 받았다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곧바로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2016년 1월 18일 대장암으로 인해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3] 한편, 대학(고려대) 1학년 때인 1973년 필리핀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됐지만 대회 도중 숙소에서 불이 나 3층에서 뛰어내리다 부상을 입은 뒤 한동안 성인 국가대표팀을 떠났다가 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통해 성인 국가대표팀에 복귀했으나[14] 1977년 8월 고소공포증으로 쓰러져 또다시 국가대표팀을 떠났다가[15] 1979년 9월 다시 마운드에 섰고 1980년 8월 세계야구선수권대회부터 성인 국가대표팀에 복귀했으며[16] 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와 1980년 이후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뛸 당시에는 자신의 고유번호였던 1번을 이해창이 달고 있었던 터라[17] 14번을 달았는데 이 등번호로 유명한[18] 유백만은 본인(황규봉)과 함께 한국화장품(77년)에서 감독(유백만)-선수(황규봉), 삼성(83~85년)에서 코치(유백만)-선수(황규봉)로 호흡을 맞췄다.

출신학교편집

수상 경력편집

  • 1982년 최우수 구원, 최다 세이브(11세이브)

통산 기록편집





































4














W
H
I
P
1982 삼성 29 15 11 .577 2.47 47 16 8 2 11 0 222.1 188 11 34 3 99 6 1 4 78 61 865 1.00
1983 30 6 4 .600 3.67 30 14 5 1 3 0 130.0 136 10 36 4 45 10 0 4 66 53 548 1.32
1984 31 10 2 .833 3.25 30 8 2 1 4 0 108.0 109 4 24 1 48 8 0 2 42 39 452 1.23
1985 32 14 7 .667 3.04 34 24 4 0 4 0 165.2 158 12 38 2 55 4 2 1 66 56 679 1.18
1986 33 3 5 .375 3.96 13 8 1 0 2 0 50.0 48 4 20 0 10 1 0 2 26 22 208 1.36
KBO 통산 : 5년 48 29 .623 3.08 154 70 20 4 24 0 676.0 639 41 152 10 257 29 3 13 278 231 2752 1.17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각주편집

  1. 이범호 (1998년 6월 1일). "뿌리깊은 전통 자랑스러워요", 성주초등 개교 90주년”. 영남일보. 2020년 9월 5일에 확인함. 
  2. 야구인들이 추억하는 故 황규봉 - 스포츠동아
  3. 김지석 (2002년 12월 13일). “땀.눈물 그리고 우승 되돌아본 21년-(15)아쉬운 84년 KS”. 매일신문. 2020년 4월 9일에 확인함. 
  4. 최두성 (2011년 7월 4일). “[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⑫1986년 해태 선수단 버스 방화사건”. 매일신문. 2020년 4월 9일에 확인함. 
  5. “黃圭奉(황규봉) 투수코치 승격”. 동아일보. 1986년 11월 27일. 2020년 9월 7일에 확인함. 
  6. “스타출신 코치 늘었다”. 동아일보. 1986년 12월 27일. 2020년 9월 18일에 확인함. 
  7. “스포츠단신”. 동아일보. 1989년 11월 22일. 2020년 3월 27일에 확인함. 
  8. 최영호 (1999년 3월 5일). “[삼성라이온즈18년 .4] 정동진감독”. 영남일보. 2020년 9월 7일에 확인함. 
  9. 최영호 (1999년 3월 5일). “[삼성라이온즈18년 .4] 정동진감독”. 영남일보. 2020년 3월 22일에 확인함. 
  10. 최영호 (1999년 3월 5일). “[삼성라이온즈18년 .4] 정동진감독”. 영남일보. 2020년 3월 22일에 확인함. 
  11. 최두성 (2011년 10월 3일). “[with 라이온즈 30년] (18) 옷 벗은 감독들”. 매일신문. 2020년 3월 25일에 확인함. 
  12. 이재국 (2016년 1월 20일). “삼성 ‘원년 에이스’ 황규봉, 별이 지다”. 스포츠동아. 2020년 3월 22일에 확인함. 
  13. 삼성 ‘원년 에이스’ 황규봉, 별이 지다 - 스포츠동아
  14. “세계 野球選手權(야구선수권)대회 出戰(출전) 韓國(한국)선수단 向發(향발)”. 경향신문. 1976년 11월 26일. 2020년 8월 2일에 확인함. 
  15. 芳(방) (1980년 4월 1일). "야구에의 매력·自信(자신)잃어"黃圭奉(황규봉) 돌연 은퇴고집”. 경향신문. 2020년 8월 2일에 확인함. 
  16. “8월 東京(동경) 세계野球(야구)에 출전 崔東原(최동원)등 20명 선발”. 경향신문. 1980년 7월 15일. 2020년 8월 2일에 확인함. 
  17. 김건일 (2018년 1월 18일). "에이스 될래요" 투수들의 '워너비' 등번호 1번”. 스포티비뉴스. 2020년 8월 2일에 확인함. 
  18. 김학순 (1983년 3월 12일). “선수들의 간판 백넘버 그由來(유래)와 얽힌 事緣(사연)들”. 경향신문. 2020년 8월 2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