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일본 프로 야구의 구단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일본어: 福岡ソフトバンクホークス 후쿠오카소푸토방쿠호쿠스[*], 영어: Fukuoka SoftBank Hawks)는 일본프로 야구 구단으로, 퍼시픽 리그 소속이다. 연고지는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주오구이며 홈 구장은 후쿠오카 PayPay 돔이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Fukuoka SoftBank Hawks
이니셜 로고
회사명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주식회사
설립 연도 1938년
소속 리그
퍼시픽 리그
이전 구단명
  • 난카이군 (1938년 ~ 1944년)
  • 긴키 닛폰군 (1944년 ~ 1945년)
  • 긴키 그레이트 링 (1946년 ~ 1947년)
  • 난카이 호크스 (1947년 ~ 1988년)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89년 ~ 2004년)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5년 ~ 현재)
홈 구장
후쿠오카 PayPay 돔
수용 인원 38,561명 (개최시 35,773명)
연고지
영구 결번
역대 타이틀
일본 시리즈 우승(11회)
1959 • 1964 • 1999 • 2003 • 2011 • 2014 • 2015 • 2017 • 2018 • 2019 • 2020
리그 우승(21회)
1946 • 1948 • 1951 • 1952 • 1953 • 1955 • 1959 • 1961 • 1964 • 1965 • 1966 • 1973 • 1999 • 2000 • 2003 • 2010 • 2011 • 2014 • 2015 • 2017 • 2020
센트럴·퍼시픽 교류전 우승·최고 승률(8회)
(2015년부터 2018년까지는 최고 승률)
2008 • 2009 • 2011 • 2013 • 2015 • 2016 • 2017 • 2019
성적(타이틀 이외)
아시아 시리즈 출장(1회)
(굵은 글씨는 우승, 이탤릭은 준우승)
2011
일본 시리즈 출장(20회)(굵은 글씨는 승리한 해)
11승 9패
1951 •
1952 • 1953 • 1955 • 1959 • 1961 • 1964 • 1965 • 1966 • 1973 • 1999 • 2000 • 2003 • 2011 • 2014 • 2015 • 2017 • 2018 • 2019 • 2020
클라이맥스 시리즈(14회)
(굵은 글씨는 승리한 해, 이탤릭은 제1 스테이지 탈락)
7승 7패
2007 • 2009 • 2010 • 2011 • 2012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2 • 2023
플레이오프(2004 ~ 2006)(3회)
(굵은 글씨는 승리한 해, 이탤릭은 제1 스테이지 탈락)
0승 3패
2004 • 2005 • 2006
플레이오프(전·후기제)(1회)
(굵은 글씨는 승리한 해, 이탤릭은 후기 우승)
1승 0패
1973
구단 조직
구단주 손정의 (손 마사요시)
(대행: 고토 요시미쓰)
감독 고쿠보 히로키
유니폼
원정

역사 편집

난카이 시대 편집

1944년부터 1947년까지의 긴키 니혼군·긴키 그레이트 링 시대는 포함하지 않는다.

창단 편집

1938년 3월 1일에 난카이 전기 철도를 모회사로 하는 난카이군(南海軍)이 결성되었다. 간사이 사철 계에서는 한신 전기 철도, 한신 급행 철도에 이은 세 번째 프로 야구 구단이 되었지만 한신의 호소노 노보루나 한큐의 고바야시 이치조가 난카이에 설립을 권유해 난카이의 사장에 말에 따라 결성을 결정했다고 한다. 창설 당시의 내용은 《진통의 고통을 모르는 유유함에서 태어난》과 《난카이 호크스 40년사》에 기록되어 있다.

같은 해 3월 29일에 행해진 일본 직업 야구 연맹 총회에서 가입이 승인되었다. 그 가운데 나고야 긴코군야마구치 이사오가 반대 의견을 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시 연맹의 이사장이었던 스즈키 류지는 "오래된 이야기인데 누가 말했는가? 확실하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1937년부터 8개 구단으로 리그전을 개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카이가 합류한다면 9팀이 되어 한 팀은 다른 팀들의 경기일에 쉬게 되어 반대 의견이 이 때부터 나왔다고 한다. 한편 오사카 타이거스의 상무인 호소노가 난카이의 가입이 승인되지 않을 경우 연맹 탈퇴도 불사하겠다고 말한 소문도 있으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는 없었다고 총회에 참석한 위원장 노구치의 증언이 있었다. 또한 당시에는 감독과 선수 총합 14명으로 인원이 부족했다. 그러나 연맹과 리그의 참가 팀들은 조건부 참가를 결정했다. 이는 춘계 리그의 시작이 가까워져 일정 편성을 조정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선수를 보강하고 그 실력을 인정하여 추계 리그의 참가를 인정한다"는 것으로 춘계 리그에서는 참가할 수 없는 준 가맹 팀의 입장이었고, 추계 리그부터 합류하게 된다. 연고지는 오사카부 사카이시사카이 오하마 구장으로 결정되었다.

전쟁 전 편집

1938년 7월 22일 난카이의 첫 공식 경기인 '제2회 요미우리 우승 대회'의 대 라이온군 전이 고라쿠엔 구장에서 행해졌지만 선발 투수였던 료 세쇼가 3이닝 3실점으로 강판되는 등 8대 5로 패배했다. 7월 28일에는 사카이 오하마 구장에서 열린 한큐군과의 '난카이군 결성 기념 경기'에서 3회에 2점을 먼저 얻었으나 우천 취소되었다. 8월 27일에 추계 리그가 개막하면서 난카이는 리그 공식전 첫 경기인 도쿄 자이언츠 전(고라쿠엔 구장)에서 요미우리가 먼저 3점을 얻은 뒤 동점을 만들었으나 릴리프로 등판한 빅토르 스타루힌에게 막혔고 결승타를 맞으며 4대 3으로 패배했다. 9월 6일에 나고야 긴코군을 상대로 리그 공식전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추계 리그에서의 최종 성적은 11승 26패 3무로 1위와 18경기 차이를 내며 9팀 중 8위에 머물렀다.

1939년에는 본거지 구장으로 나카모즈 구장이 완성되었으나 공식전은 주로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이나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렸다. 징집에서 제외된 이와모토 요시유키와 입단한지 얼마 되지 않은 쓰루오카 가즈토가 있었는데 쓰루오카는 첫 해부터 10홈런으로 구단 최초의 타이틀이 되는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쓰루오카도 동년을 마지막으로 전쟁에 소집되어 전쟁 이전에는 한계를 맞이했다. 리그는 연중 1시즌 제였으며 편의상 춘계·하계·추계의 3분기로 나누었는데 추계에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춘계와 하계에는 승률이 낮아 통합 1위인 요미우리와 25경기 차로 5위에 머물렀다.

전쟁 후 편집

1940년대 중반에 전시 기업 통합 정책으로 인해 긴테쓰와 통합하며 긴키 닛폰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후, 긴키 닛폰 그레이트 링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모두 모기업인 난카이 전기 철도가 경영권을 유지하면서 진행되었는데, 1947년, 난카이 호크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면서 일본 프로 야구가 퍼시픽 리그와 센트럴 리그로 분할된 1950년부터 1973년까지 24년 동안 2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과 10번의 퍼시픽 리그 우승을 거두며 니시테쓰 라이온스와 더불어 4,60년대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강호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몰락하여, 장기간의 침체기에 돌입했다. 1977년 2위를 마지막으로 1997년까지 20년간 일본 프로 야구에서 3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지 못했는데(6팀 중 상위 3팀을 A클래스, 하위 3팀을 B클래스로 부름), 이는 현재까지도 일본 프로 야구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장기간의 침체와 누적되는 적자로 모기업 내부에서는 팀의 운영에 회의적인 시각이 팽배해졌지만, 호크스의 모기업인 난카이 전기철도의 회장이자 구단의 구단주이기도 한 가와카쓰 덴의 강력한 의지로 팀은 계속 보유했다. 한편, 1983년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OB 베어스가 외국 전지훈련(대만 일본)을 치를 당시 해당 팀과 연습경기를 치르면서 처음으로 일본 프로 선수들과의 맞대결을[1] 경험했다. 그러나 1988년 가와카쓰 덴 회장의 사망과 더불어 구단은 팀 운영을 포기하여 당시 일본 수퍼마켓, 백화점 체인을 운영하는 다이에에게 구단을 매각하여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다이에 회장인 나카우치는 당시 규슈 지역이 성장하는 아시아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리라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추후 확장하는 사업을 규슈 최대 도시인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전개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나카우치는 호크스의 규슈 이전을 추진, 라이온스가 떠난 후 10년 동안 공석으로 남아있던 후쿠오카로 팀을 이전했다. 과거 난카이 호크스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본거지로의 이전이었지만, 30년 가까이 응원하던 팀을 잃고 10년 동안 프로 야구에 굶주려 있던 후쿠오카 시민은 과거의 적이었던 호크스를 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나카우치는 인수 당시 10년 가까이 침체 분위기에 있던 팀을 살리고자 모기업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한다.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다부치 고이치, 오 사다하루 등 과거의 스타 플레이어 출신 감독을 영입하는 한편, 1994년부터 시작된 프리 에이전트 제도를 바탕으로 당시 전성기에 있던 세이부를 비롯한 타 구단의 스타 선수들의 영입에도 열심이었다. 그리고 아마추어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풍부한 자금력을 배경으로 당시 역지명 제도를 최대한 활용 대형 신인의 영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팀의 체질개선을 꾀했다. 그러한 일련의 과감한 투자의 절정은 당시 800억엔이라는 거금을 투입한 후쿠오카 돔의 건설이었다.

그러나 팀의 체질 개선과 명문 부활을 위한 나카우치의 대대적인 투자와 반비례해서, 팀은 후쿠오카 이전 후에도 하위권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고 초반에는 환영 분위기였던 후쿠오카 시민들의 열기도 점점 식어갔으며 빙그레 이글스1989년 시즌 후 전년도 최다 선발승(14선발승) 투수 한희민[2], 포수 김상국[3], 같은 해(1989년) 입단한 투수 송진우[4], 내야수 장종훈[5] 강석천, 투수 한용덕을 해당 팀 추계훈련에 참가시켰고 다음 해에는 이정훈 등이[6], 1991년에는 양용모 등이[7], 1992년에는 지연규 지화동 등이[8] 다이에 추계훈련에 참여했는데 이들 중 김상국1990년부터 주전포수를 맡았으며 한용덕1991년 최다 선발승(16선발승), 장종훈1990년부터 3년 연속 홈런왕(타점왕까지 포함하여 2관왕)[9], 이정훈1991년부터 2년 연속 타격왕[10], 송진우2001년 5월 10일 두산전 선발승으로[11] 개인통산 6번째 100선발승(좌완으로 치자면 첫 번째)을 달성하는 등 기량이 발전하기도 했다. 다만, 김영덕 감독의 후임으로 한화 이글스 감독에 부임한 사람이자 김 감독과 달리 소위 '미국통'이었던 강병철 감독이 부임하면서 이글스는 일본과의 커넥션이 끊어지기도 했는데 역대 최고인 8연속 10선발승 이상(92~96년 13선발승 97년 14선발승 98년 10선발승 99년 17선발승)을 기록한 정민철과 포크볼의 황제 이상목, 고졸신인으로 들어와 아쉽게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음에도 3할을 치며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박지상 (이상 94년)[12]을 끝으로 다이에 캠프 보이들이 대가 끊겼다. 침체가 계속되던 1998년 오릭스와의 동률 3위로 21년 연속 B클래스(하위권을 지칭하는 일본 언론의 표현)를 벗어나자 팀은 상승 분위기를 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999년에는 후쿠오카 이전 11년 만에 퍼시픽 리그 우승을 거둔다. 이어 벌어진 일본 시리즈에서도 당시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이끄는 주니치가 우세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4승 1패의 압도적 전적으로 우승, 강팀으로의 탈바꿈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팀이 강팀으로의 변모에 성공하게 될 무렵부터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의 영향으로 모기업인 다이에는 경영의 난관에 봉착, 구단에 대한 투자는 축소 일로를 걷게 된다. 모기업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98년부터 시작된 상위권 생활은 계속 이어져 2000년에는 리그 우승, 2003년에는 일본 시리즈 챔피언의 자리에 복귀하며 과거 명문 구단이었던 호크스의 부활에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쌓여가는 적자를 견디지 못한 다이에 그룹은 그동안 전개했던 사업을 축소, 결국 구단도 구조조정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2004년 시즌 종료 직후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에 매각되었다. 2005년 시즌부터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소프트뱅크는 구단 인수 후, 다이에 초기시절을 연상케 하는 과감한 투자에 나서 과거 다이에가 10년을 걸쳐서 이룩한 강팀의 면모의 유지, 발전에 진력하고 있다.

팀의 특징 편집

난카이 시대
  • 1948년프랜차이즈제 도입 당시 잠정적으로 한신 고시엔 구장을 본거지로 결정했다. 1950년 9월 12일 오사카 구장이 완성되면서 본거지를 이전했고 1950년 시즌에는 이전까지 사용했던 후지이데라 구장을 이용했다.
  • 난카이 시대의 팀 컬러는 녹색.
  • 난카이 시대의 텔레비전 야구 중계에 있어서는 난카이 전철이 주요 주주로 있던 마이니치 방송이 1959년에 방송국을 개국할 때 오사카 구장에서 진행되는 전 경기의 독점 중계권을 체결했다. 이 해에는 난카이가 일본 제일을 달성하여 1961년 발행된 마이니치 방송의 역사는 당시를 '일대 히트'라고 표현했다. 이 성공으로 난카이 측은 TV중계의 묘미를 알게 되어 1960년의 계약에서는 인기를 근거로 들며 방영권 비용을 크게 인상시켜 요구했다. 그래서 마이니치 방송 측은 홈의 35경기에 대해서 우선 방송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방영권의 상승을 우려한 마이니치 방송은 1961년 난카이와의 협상을 포기하고 TV의 야구 중계 자체를 크게 줄였다(단 마이니치 방송과의 관계는 규모를 대폭 축소시키면서도 다이에에 매각하기 전까지는 함께 했다). 그 이후 도쿄 키국의 발언권이 강해져 간사이 지역에서도 닛폰 TV 방송망 및 기타 주요 키국 계열의 요미우리전 전국 네트워크 중계로 요미우리와 같은 센트럴 리그를 위해 요미우리와 대전하는 한신 타이거스의 경기를 자주 방송했다. 이 때문에 기존에 퍼시픽 리그의 인기가 높았던 간사이에서도 야구 인기가 센트럴 리그로 옮겨가게 되었고, 퍼시픽 리그와 난카이의 인기는 하락하였다. 그 결과로 난카이의 TV중계는 더욱 감소하며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한신에게 일극 집중되면서 어떻게든 한신전 방송을 확보하려는 방송국들의 관심도 옮겨 갔다.
  • 팀 성적이 호조로 오사카에서 호크스의 인기가 높았던 시절에도 경영난으로 항상 침체되어 있어 난카이 내에서의 호크스의 입지는 작았다. 일반적으로 철도 회사가 구단을 경영하는 경우에는 한신의 고시엔 구장 및 긴테쓰의 후지이데라 구장이나 세이부의 세이부 돔과 같이 모회사의 철도를 이용해야 하는 곳에 구장을 두고 자사의 철도 이용객 증가에 기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책이지만 난카이는 난바라고 하는 난카이 이외의 철도(긴테쓰나 오사카 지하철 등)를 이용할 수 있어서 매년 적자를 내어 본사가 보전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당시 전철의 노동 조합에서 임금 인상을 벌일 때마다 "야구에 지원할 돈이 있으면 임금을 인상하라" "빨리 구단을 팔아라"라며 흑자로 전환되지 않는 구단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을 들었다(비슷한 상황은 연선 외부에 생긴 오사카 돔 이전 후의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후쿠오카 시대
  • 홈구장인 후쿠오카 PayPay 돔은 1루 측은 물론 3루 측의 관중석도 호크스의 팬들이 차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본거지가 일본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해 있고 다른 구단의 홈구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가장 가까운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구장인 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에서 약 250km, 동일 리그인 오릭스 버펄로스교세라 돔 오사카와는 약 600km) 다른 팀의 팬들이 찾기 힘들고 현지 팬이 많기 때문이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주최 경기 1경기의 평균 관중 수는 2012년도 통계를 보면 33,933명으로 퍼시픽 리그에서는 1위이며, 전체로 확대하면 요미우리(40,333명)와 한신(37,886명)에 이은 3위이다. 1993년 이후 관객 동원이 200만 명에 육박하며 후쿠오카 돔(현재의 후쿠오카 야후오쿠! 돔)이 개장한 1993년부터 2012년까지 20년 연속으로 주최 경기의 관중 수는 퍼시픽 리그 1위이다.

역대 감독 편집

〈 〉은 재임 차수.

연도별 성적 편집

연도 감독 순위 경기 승리 패전 무승부 승률 승차 타율 홈런 평균자책점 비고
1938년 추계 다카스 가즈오 8위 40 11 26 3 .297 18 .202 5 2.82
1939년 다카스 가즈오·미타니 하치로 5위 96 40 50 6 .444 25 .230 15 2.51
1940년 다카스 가즈오 8위 105 28 71 6 .283 45.5 .196 6 2.44
1941년 미타니 하치로 4위 84 43 41 0 .512 19 .195 12 1.82
1942년 미타니 하치로·가토 기사쿠 6위 105 49 56 0 .467 26.5 .202 11 1.90
1943년 다카다 가쓰오·가토 기사쿠 8위 84 26 56 2 .317 28.5 .184 6 2.48
1944년 가토 기사쿠 6위 35 11 23 1 .324 16.5 .201 3 2.09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 의한 경기 중단
1946년 야마모토 가즈토 1위 105 65 38 2 .631 - .273 24 3.08
1947년 야마모토 가즈토 3위 119 59 55 5 .518 19 .231 24 2.39
1948년 야마모토 가즈토 1위 140 87 49 4 .640 - .255 45 2.18
1949년 야마모토 가즈토 4위 135 67 67 1 .500 18.5 .270 90 3.95
1950년 야마모토 가즈토 2위 120 66 49 5 .574 15 .279 88 3.38
1951년 야마모토 가즈토 1위 104 72 24 8 .750 - .276 48 2.40
1952년 야마모토 가즈토 1위 121 76 44 1 .633 - .268 83 2.84
1953년 야마모토 가즈토 1위 120 71 48 1 .597 - .265 61 3.02
1954년 야마모토 가즈토 2위 140 91 49 0 .650 0.5 .250 82 2.50
1955년 야마모토 가즈토 1위 143 99 41 3 .707 - .249 90 2.61
1956년 야마모토 가즈토 2위 154 96 52 6 .643 0.5 .250 68 2.23
1957년 야마모토 가즈토 2위 132 78 53 1 .595 7 .252 98 2.68
1958년 야마모토 가즈토 2위 130 77 48 5 .612 1 .248 93 2.53
1959년 쓰루오카 가즈토 1위 134 88 42 4 .677 - .265 90 2.44
1960년 쓰루오카 가즈토 2위 136 78 52 6 .600 4 .247 103 2.88
1961년 쓰루오카 가즈토 1위 140 85 49 6 .629 - .262 117 2.96
1962년 쓰루오카 가즈토 2위 133 73 57 3 .562 5 .253 119 3.27
1963년 쓰루오카 가즈토 2위 150 85 61 4 .582 1 .256 184 2.70
1964년 쓰루오카 가즈토 1위 150 84 63 3 .571 - .259 144 3.12
1965년 쓰루오카 가즈토 1위 140 88 49 3 .642 - .255 153 2.80
1966년 쓰루오카 가즈토 1위 133 79 51 3 .608 - .245 108 2.59
1967년 쓰루오카 가즈토 4위 133 64 66 3 .492 11 .235 108 3.04
1968년 쓰루오카 가즈토 2위 136 79 51 6 .608 1 .243 127 2.92
1969년 이이다 도쿠지 6위 130 50 76 4 .397 26 .241 85 3.56
1970년 노무라 가쓰야 2위 130 69 57 4 .548 10.5 .255 147 3.43
1971년 노무라 가쓰야 4위 130 61 65 4 .484 22.5 .260 156 4.27
1972년 노무라 가쓰야 3위 130 65 61 4 .516 14 .253 133 3.48
1973년 노무라 가쓰야 1위 130 68 58 4 .540 (1)(3) .260 113 3.35 전기 1위, 후기 3위
1974년 노무라 가쓰야 3위 130 59 55 16 .518 (4)(2) .246 124 3.06 전기 4위, 후기 2위
1975년 노무라 가쓰야 5위 130 57 65 8 .467 (5)(3) .246 102 2.98 전기 5위, 후기 3위
1976년 노무라 가쓰야 2위 130 71 56 3 .559 (2)(2) .259 97 2.91 전기 2위, 후기 2위
1977년 노무라 가쓰야 2위 130 63 55 12 .534 (2)(3) .250 108 3.15 전기 2위, 후기 3위
1978년 히로세 요시노리 6위 130 42 77 11 .353 (6)(6) .239 78 4.01 전기 6위, 후기 6위
1979년 히로세 요시노리 5위 130 46 73 11 .387 (5)(6) .276 125 4.86 전기 5위, 후기 6위
1980년 히로세 요시노리 6위 130 48 77 5 .384 (5)(6) .274 183 5.63 전기 5위, 후기 6위
1981년 돈 블레이저 5위 130 53 65 12 .449 (5)(6) .273 128 4.37 전기 5위, 후기 6위
1982년 돈 블레이저 6위 130 53 71 6 .427 (5)(6) .255 90 4.05 전기 5위, 후기 6위
1983년 아나부키 요시오 5위 130 52 69 9 .430 31.5 .268 128 4.75
1984년 아나부키 요시오 5위 130 53 65 12 .449 21 .269 159 4.89
1985년 아나부키 요시오 6위 130 44 76 10 .367 33 .260 149 5.05
1986년 스기우라 다다시 6위 130 49 73 8 .402 21.5 .251 136 4.46
1987년 스기우라 다다시 4위 130 57 63 10 .475 16 .261 132 3.86
1988년 스기우라 다다시 5위 130 58 71 1 .450 17.5 .267 162 4.07
1989년 스기우라 다다시 4위 130 59 64 7 .480 11 .257 166 4.74
1990년 다부치 고이치 6위 130 41 85 4 .325 40 .251 116 5.56
1991년 다부치 고이치 5위 130 53 73 4 .421 29 .253 152 4.74
1992년 다부치 고이치 4위 130 57 72 1 .442 24 .258 139 4.60
1993년 네모토 리쿠오 6위 130 45 80 5 .360 28 .246 75 4.22
1994년 네모토 리쿠오 4위 130 69 60 1 .535 7.5 .275 132 4.10
1995년 오 사다하루 5위 130 54 72 4 .429 26.5 .259 94 4.16
1996년 오 사다하루 6위 130 54 74 2 .422 22 .263 97 4.04
1997년 오 사다하루 4위 135 63 71 1 .470 14 .264 132 4.26
1998년 오 사다하루 3위 135 67 67 1 .500 4.5 .264 100 4.02
1999년 오 사다하루 1위 135 78 54 3 .591 - .257 140 3.65
2000년 오 사다하루 1위 135 73 60 2 .549 - .268 129 4.03
2001년 오 사다하루 2위 140 76 63 1 .547 2.5 .273 203 4.49
2002년 오 사다하루 2위 140 73 65 2 .529 16.5 .267 160 3.86
2003년 오 사다하루 1위 140 82 55 3 .599 - .297 154 3.94
2004년 오 사다하루 2위 133 77 52 4 .597 .292 183 4.58
2005년 오 사다하루 2위 136 89 45 2 .664 .281 172 3.46
2006년 오 사다하루 3위 136 75 56 5 .573 .259 82 3.13
2007년 오 사다하루 3위 144 73 66 5 .525 6 .267 106 3.18
2008년 오 사다하루 6위 144 64 77 3 .454 12.5 .265 99 4.05
2009년 아키야마 고지 3위 144 74 65 5 .532 6.5 .263 129 3.69
2010년 아키야마 고지 1위 144 76 63 5 .547 - .267 134 3.89
2011년 아키야마 고지 1위 144 88 46 10 .657 - .267 90 2.32
2012년 아키야마 고지 3위 144 67 65 12 .508 6.5 .252 70 2.56
2013년 아키야마 고지 4위 144 73 69 2 .514 9.5 .274 125 3.56
2014년 아키야마 고지 1위 144 78 60 6 .565 - .280 95 3.25
2015년 구도 기미야스 1위 143 90 49 4 .647 - .267 141 3.16
2016년 구도 기미야스 2위 143 83 54 6 .606 2.5 .261 114 3.09
2017년 구도 기미야스 1위 143 94 49 0 .657 - .259 164 3.22
2018년 구도 기미야스 2위 143 82 60 1 .577 6.5 .266 202 3.90
2019년 구도 기미야스 2위 143 76 62 5 .551 2 .251 183 3.63
2020년 구도 기미야스 1위 120 73 42 5 .635 - .249 126 2.92
2021년 구도 기미야스 4위 143 60 62 21 .492 8.5 .247 132 3.25
2022년 후지모토 히로시 2위 143 76 65 2 .539 0 .255 108 3.07
2023년 후지모토 히로시 3위 143 71 69 3 .507 15.5 .248 104 3.27
  • 2023년 시즌 종료 기준,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 통산 성적 : 5616승 402무 5000패(승률 .529)

구단 기록 편집

경기·승패·승률에 관한 기록 편집

 
1950부터 현재까지의 팀 순위, 붉은점은 일본 시리즈 우승을 나타냄
  • 리그 우승 : 21회
    • 단일 리그 시대 : 2회(1946년, 1948년)
    • 양대 리그제 이후 : 19회(1951년 ~ 1953년, 1955년, 1959년, 1961년, 1964년 ~ 1966년, 1973년, 1999년 ~ 2000년, 2003년, 2010년 ~ 2011년, 2014년 ~ 2015년, 2017년, 2020년)[16]
  • 일본 시리즈 우승 : 11회
(1959년, 1964년, 1999년, 2003년, 2011년, 2014년, 2015년, 2017년 ~ 2020년)
  •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 : 7회
(2011년, 2014년, 2015년, 2017년 ~ 2020년)
  • 센트럴·퍼시픽 교류전 우승·최고 승률 : 8회(2015년부터 2018년까지는 최고 승률)
(2008년, 2009년, 2011년, 2013년, 2015년 ~ 2017년, 2019년)
  • A클래스 : 52회
    • 단일 리그 시대 : 5회(1941년, 1946년 ~ 1949년)
    • 양대 리그제 이후 : 47회(1950년 ~ 1966년, 1968년, 1970년, 1972년 ~ 1974년, 1976년 ~ 1977년, 1998년 ~ 2007년, 2009년 ~ 2012년, 2014년 ~ 2020년, 2022년 ~ 2023년)[17]
  • B클래스 : 33회
    • 단일 리그 시대 : 7회(1938년 추계 ~ 1940년, 1942년 ~ 1944년)
    • 양대 리그제 이후 : 27회(1967년, 1969년, 1971년, 1975년, 1978년 ~ 1997년, 2008년, 2013년, 2021년)
  • 연속 A클래스 진입 최장 기록 : 21년(1946년 ~ 1966년)
  • 연속 B클래스 최장 기록 : 20년(1978년 ~ 1997년)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최다 승리 : 99승(1955년)
  • 최다 패전 : 85패(1990년)
  • 최다 무승부 : 16무(1974년)
  • 최고 승률 : .750(1951년)
  • 최저 승률 : .283(1940년)
  • 최다 연승 : 18연승(1954년)
  • 최다 연패 : 15연패(1969년)
  1. 2004년2005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정규 시즌 우승으로 제2 스테이지에 진출(5경기차 이상으로 1승의 어드벤티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2004년과 2005년 모두 4.5경기차로 어드벤티지 없이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했는데 2004년은 세이부, 2005년은 지바 롯데에게 모두 2승 3패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패했다. 당시의 플레이오프의 규정에 의해 2004년과 2005년 모두 최종 성적은 2위가 되었다.
  2. 2006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정규 시즌 3위를 차지한 것에 의해 제1 스테이지에 출전했다. 정규 시즌 2위팀인 세이부를 누르고(2승 1패) 제2 스테이지에 진출했지만 그 해 2004년과 2005년에 2년 연속으로 정규 시즌 우승 팀(호크스)이 패했기 때문에 제도가 변경되면서 승차에 관계없이 무조건 1위 팀에게 어드벤티지 1승이 주어진 적도 있어 시즌 1위 팀인 닛폰햄에게 2연패를 당했다.
  3. 2007년에는 리그 3위를 차지하면서 그 해부터는 센트럴 리그에서도 플레이오프제를 도입해 명칭이 변경된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1 스테이지에 출전, 지바 롯데에게 1승 2패로 패했다(2007년부터 정규 시즌 1위팀이 리그 우승이 되면서 클라이맥스 시리즈 자체가 일본 시리즈 출전권을 놓고 대결하는 경기로 발전했다).

그 외의 기록 편집

  • 최소 경기차 : 0경기차(2010년)
  • 최대 경기차 : 45.5경기차(1940년)
  • 최고 득점 : 822득점(2003년)
  • 최다 안타 : 1461개(2003년)
  • 최다 홈런 : 203개(2001년)
  • 최소 홈런 : 3개(1944년)
  • 최고 타율 : .297(2003년) ※프로 야구 기록.
  • 최저 타율 : .184(1943년)
  • 최고 평균자책점 : 1.82(1941년)
  • 최저 평균자책점 : 5.63(1980년)
  • 전체 11개 구단을 상대해 승리하여 완전 우승(2011년) ※프로 야구 기록.

역대 홈구장 편집

각주 편집

  1. 배영은 (2016년 2월 2일). “아웃사이드 파크 - 역대 스프링캠프 풍경 속으로”. 일요신문. 2020년 10월 28일에 확인함. 
  2. “스포츠 說往說來”. 충청투데이. 1991년 10월 19일. 2020년 10월 28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3. “스포츠 說往說來”. 충청투데이. 1991년 10월 19일. 2020년 10월 28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 “스포츠 說往說來”. 충청투데이. 1991년 10월 19일. 2020년 10월 28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5. “체육短信”. 충청투데이. 1990년 10월 29일. 2020년 10월 28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6. “체육短信”. 충청투데이. 1990년 10월 29일. 2020년 10월 28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7. “이글스, 일본 가을캠프에 5명 파견”. 연합뉴스. 1991년 10월 19일. 2020년 10월 28일에 확인함. 
  8. “日추계캠프 5명 파견”. 충청투데이. 1992년 10월 19일. 2020년 10월 28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9. 민창기 (2014년 8월 28일). “장종훈-이승엽-박병호, 누가 최고의 홈런타자인가”. 스포츠조선. 2020년 10월 28일에 확인함. 
  10. 이상학 (2012년 8월 28일). “한화 다음 사령탑은 누구? 이정훈-김성근 물망”. OSEN. 2020년 10월 28일에 확인함. 
  11. 천병혁 이정진 (2001년 5월 10일). “-프로야구- 해태, 김응용감독 상대 싹쓸이”. 연합뉴스. 2020년 10월 28일에 확인함. 
  12. "95한국시리즈 절대 안놓친다". 중도일보. 1994년 10월 15일. 2020년 10월 28일에 확인함. 
  13. 본명인 야마모토 가즈토(山本一人)를 1959년 시즌부터 쓰루오카 가즈토(鶴岡一人)라는 이름을 개명, 1962년 시즌 성적 부진을 이유로 수개월간 휴양 생활을 했으며, 이후 1966년부터 다시 감독직을 수행.
  14. 취임한 지 4일 후에 실질적인 팀의 지휘를 하지 못한 채 갑작스런 사망.
  15. 2006년 시즌 도중에 갑작스런 암이 발병하여 2006년 시즌 종료까지 치료를 위해 휴양.
  16. 1973년은 전기 1위(연간 승률에서는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고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3승 2패의 성적을 거둬 우승했다.
  17. 1998년은 오릭스와 동률인 3위를 차지했고, 1997년에 오릭스는 2위, 다이에는 동률 4위를 기록하면서 1999년의 시즌 개막권을 얻지 못했다.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