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이집트 혁명

1952년 이집트 혁명무하마드 나기브, 가말 압델 나세르 등이 이끌던 자유장교단이 주도한 혁명으로 군주제와 신분 제도의 폐지를 도래했다.

1952년 이집트 혁명
냉전의 일부

1954년 무하마드 나기브가말 압델 나세르
날짜1952년 7월 23일
장소
결과

자유장교단의 승리

교전국

이집트 왕국 이집트 왕국
지원국

영국 영국
이집트 자유장교단
지휘관
이집트 왕국 파루크 1세

이집트 무하마드 나기브
이집트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칼레드 모히에딘
이집트 압델 하킴 아메르
이집트 자카리아 모히에딘

이집트 후세인 엘 샤페이

혁명 전 이집트 사회는 왕정이었으며, 신분 제도가 존재하였다. 토지는 소수의 귀족, 지주의 수중에 있었고, 다수의 농민은 소작농이었다. 이집트는 1922년 2월 28일에 영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부분의 자본이 영국 대자본에 잠식된 상태였으며, 외교, 정치 영역에서는 영국의 공식적인 간섭을 받고 있었다. 여러 사실을 종합할 때 이집트는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낙후한 이집트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상과, 서구 제국주의로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진보적인 군 장교들과 하급 간부들은 자유장교단을 조직하였고, 1952년에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주제와 신분 제도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성립하였다. 또한 이집트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차단하였다.[1] 이집트 혁명으로 출범한 나세르 정부는 아랍사회주의비동맹주의 원칙을 주장하며 각종 정책을 시행했다. 나세르가 사망한 이후 안와르 사다트가 정권을 쥐면서 크게 아랍사회주의는 쇠퇴했고, 리비아와 분쟁을 겪으며 나세르가 주도한 이집트 혁명의 여파는 크게 감소했다.

원인 편집

1882년 영국군은 앵글로-이집트 전쟁을 통하여 이집트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1888년 콘스탄티노플 협약을 통해 영국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군사 점령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령에서 일정한 수준의 독립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이 시기 이집트 국왕인 압바스 2세는 영국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고 그 결과 동맹국을 지원하였다. 승전한 영국은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영토를 강제적으로 자국의 식민지로 편입하였다.[2]

이후 이집트의 반영(反英) 감정이 고조되었다. 1919년 3월 이집트 인민은 대규모 봉기(1919년 이집트 혁명)를 일으켰다. 영국은 이집트 지배의 유화책으로서 1922년 2월 28일에 공식적으로 이집트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순탄한 지배를 위한 것이었으며, 영국군은 그대로 이집트에 주둔한 상태였다. 게다가 대부분의 군사, 외교, 정치 영역에 있어서는 보호령 수준의 간섭을 하였으며, 이러한 간섭은 공식적인 것이었다.[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은 이집트의 군사와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중단하였으나, 여전히 사회는 영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실질적으로 당시 이집트는 모든 면에서 영국에 의존된 상태였으며, 기업과 토지도 또한 영국인 지주와 주주의 손아귀에 있었다.[4]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는 이집트 민족주의자의 영향력이 급증하던 때였다. 1940년대 후반부터 이집트 반제국주의자에 의한 소규모 봉기가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지원에 대한 이집트 왕정의 소극적인 태도는 이집트 민족주의자의 감정을 크게 격분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집트 왕정은 이집트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극심한 실업과 빈부격차, 빈곤을 해결할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후 운동은 단순히 이집트 애국주의를 넘어서, “군주정 타도, 공화국 수립”이라는 구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1949년 이집트군 내 좌익 장교를 주축으로 민족운동가, 일선 민간 관료들이 연합하여 비밀리에 ‘자유장교단’이 조직되었다. 자유장교단 성립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는 가장 열성적인 활동을 했고, 중요한 일을 맡았으나 형식적인 지도자로는 군대에서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하마드 나기브를 임명하였다.

자유장교단의 활동으로 인해 이집트군의 반영 의식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특히 대(對)이스라엘 강경파인 군 장성 하이다르 파샤(Haidar Pasha)와 하리드 파샤(Harid Pasha)는 이집트 왕정에 의해 반란 혐의로 체포를 당했으나, 대중의 반발로 풀려나게 되었다. 여러 사건이 겹쳐질수록 이집트 대중의 반제국주의 의식은 성장하게 되었다.[5]

전개 편집

한편 수에즈 운하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은 해당 지역의 반영 봉기를 진압할 준비를 하였다. 1952년 1월 25일 영국군은 페다인(Fedayeen) 지역의 경찰이 지역 민족주의자 봉기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국군은 페다인 지역 경찰에 항복 요구를 하였으나, 페다인 지역 경찰과 봉기군은 영국군 협상가를 살해하였고 항복을 거부하였다. 영국군은 이집트 경찰을 공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집트 경찰 약 50명이 사망하였고 약 100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이 이집트 전역에 전해지자 이집트인은 분노하였고 반영 감정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카이로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특히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비밀리에 자금을 지원받고 있던 자유장교단은 혁명의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였다. 자유장교단은 카이로 전역에 반(反)군주제 켐페인 포스터를 살포하였다. 파루크 1세는 기존 내각의 요인을 갈아치웠으나, 새로 성립된 내각도 부패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52년 1월 말에 이미 수도 지역의 하급 관리들은 자유장교단을 지지하고 있었다. 한편 군대 내에서 자유장교단에 지지하는 군인의 수는 급증하고 있었다. 파루크 1세는 선거를 폐지하였고, 군대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군대 내 왕당 세력을 왕정의 핵심 요인으로 등용하였다. 파루크 1세가 정권을 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자유장교단은 1952년 8월 5일에 최종적인 군사 행동을 하기로 결정했으나, 같은 해 7월 19일에 파루크 1세가 무하마드 나기브와 협상을 하겠다고 선포하면서 쿠데타 계획은 미루어졌다.

협상에서 파루크 1세는 나기브를 내각 총리로 임명하였다. 나기브는 파루크 1세가 전권을 내려놓고 망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파루크 1세는 이를 승인하였고 국외로 망명을 하였다.

각주 편집

  1. Lahav, Pnina. “The Suez Crisis of 1956 and its Aftermath: A Comparative Study of Constitutions, Use of Force, Diplomacy and International Relations”. 《Boston University Law Review》. 2020년 7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4월 28일에 확인함. 
  2. Jankowski, James. Egypt, A Short History. p. 111.
  3. Jankowski, James. Egypt, A Short History. p. 112.
  4. Collins, Robert O.; Collins, Professor of History Robert O. (29 May 2008). A History of Modern Sud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CIA Office of Current Intelligence 20 July 1952” (PDF). 2018년 7월 22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4월 28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