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호 (1887년)

형평사 설립, 동아일보 지국장, 일신여고 설립 발기인, 국채보상경남회 발기인

강상호(姜相鎬, 1887년 ~ 1957년)은 일제강점기사회운동가이다. 호는 백촌(栢村)이다.[1] 1907년 경상남도 진주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고, 진주 봉양학교와 일신고등보통학교 설립에 참여하며 민족 교육운동에 참여했다. 1923년 형평사 결성에 참여했다.

생애 편집

강상호는 1887년 진주 대안동의 양반 부호였던 강재순(姜在淳)과 부인 전주 이씨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호적부에 오른 이름은 경호(璟鎬)였으나 1916년 7월 15일에 상호(相鎬)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생으로 강기호(姜箕鎬), 아동문학가 강영호(姜英鎬), 화가 강신호(姜信鎬)가 있다. 유년기에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공립진주보통학교, 진주공립실업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했다.[2][3]

1907년 진주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14년 진주 봉양학교 설립에 참여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진주 지역에서 3월 18일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일제 경찰에게 검거된 강상호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강상호는 진주의 자산가로서 사회 운동을 하던 이찬익이 백정이었다는 이유로 자녀를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것을 보고, 형평 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장지필 등과 함께 1923년 형평사를 결성했다.[4] 1924년 2월의 형평사 전조선 임시총회에서 형평사의 중앙본부를 서울로 옮기지 않고 진주에 그대로 두자는 진주파를 이끌었다. 서울파와 진주파가 갈등 끝에 통합되자, 진주파의의 온건적 지도자였던 강상호는 형평 운동에서의 은퇴를 선언했다.

강상호는 해방 후 한국전쟁을 겪으며 보도연맹 학살로부터 살아남았으나 동생 강영호를 잃었다.[5] 강상호는 1957년 사망했으며, 진주에 그의 묘역이 있다.[6] 2005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받았다.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신진균 (2020년 7월 13일). “[서평] 형평운동의 선도자 백촌 강상호”. 《단디뉴스》. 2023년 4월 26일에 확인함. 
  2. 이미향. “천석꾼 진주 양반 강상호, 백정의 인권을 외치다”. 《지역N문화》. 2023년 4월 26일에 확인함. 
  3. 조규태 (2023). 《백촌 강상호》. 한국문화사. ISBN 9791169191166. 
  4. “조선 형평사”. 《우리역사넷》. 2023년 4월 26일에 확인함. 
  5. 김종현 (2020년 8월 11일). "소년운동 이끈 강영호 선생 항일 행적 재조명해야". 《경남도민일보》. 
  6. 김훤주 (2023년 3월 7일). “참어른 김장하 선생의 길을 따라”. 《경남도민일보》. 

참고 문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