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릉 김씨(金陵金氏)는 경상북도 김천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금릉 김씨
金陵金氏
나라한국
관향경상북도 김천시
시조김무득(金武得)
중시조김중구(金仲龜)
집성촌충청북도 옥천군 청성면
경상북도 김천시·구미시
경상북도 상주시
인구(2000년)18,158명

유래 편집

가락국(駕洛國)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셋째 아들인 김무득(金武得)을 시조로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562년(진흥왕 23) 대가야(大伽倻)가 신라의 장수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에게 정복되어 신라(新羅)와 병합(倂合)되고, 진흥왕(眞興王)이 가락국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여 시조인 김무득이 시랑(侍郞) 겸 총관(總管)에 제수하고 금릉군(金陵君)에 봉해져 본관을 금릉(金陵)으로 삼았다.

그 후의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후손들은 고려 고종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수사공(守司空)·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서경유수(西京留守) 등을 지내고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오르고 금릉군(金陵君)에 봉해진 김중구(金仲龜)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본관 편집

금릉(金陵)은 경상북도 중서부에 위치한 오늘날의 김천(金泉)지역으로 1949년 금릉군으로 개명되었다가 1995년 김천시로 폐합되었다 김천지역은 삼한시대(三韓時代)의 감문소국(甘文小國)이었다. 그후 660년(신라 무열왕 7)에 와서 감문군(甘文郡)으로 불리웠고, 757년(경덕왕 16) 개령군(開寧郡)으로 개칭되었다가 1941년 조선 총독부령에 의하여 김천군(金泉郡)으로 바뀌었으며, 1949년 김천군이 금릉군으로 개편되고 김천군은 김천부로, 다시 김천시(市)로 승격되었다. 1995년 김천시와 금릉군을 김천시로 통합하였다.

항렬자 편집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덕(德) 상(相) 유(惟) ○신(信) 석(錫) ○호(浩) 병(秉) ○로(魯) 재(在) ○현(鉉) 영(泳) ○식(植) 용(容) ○준(埈) 정(鉦) ○완(浣) 동(東) ○희(熙) 기(基) ○용(鎔) 준(浚)

주요 인물 편집

김위(金褘): 고려조(高麗朝)에서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을 지냈다.

김효탁(金孝鐸): 태자 태보(太子太保) 석보(錫保)의 아들 효탁(孝鐸)은 태자 첨사(太子詹事)에 올라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한 관(琯)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김광귀(金光貴):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참의(參議)를 지낸 택(澤)의 아들 광귀(光貴)가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냈다.

김규(金規): 광귀의 아들 규(規)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한 이름난 학자(學者)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으나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금릉군(金陵郡) 어모면 덕마동(德馬洞)에 돌아갔다가 옥천(沃川) 청산(靑山)의 청량산으로 이거(移居)하여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김각(金珏): 그리고 규(規)의 아들 각(珏)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원종이등공신(靖國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고, 덕산 현감(德山縣監)을 지냈다.

김원석(金元錫): 빈곤한 가세(家勢)에도 부모(父母) 봉양이 지극하여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장(金樟):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門人)으로 학문이 뛰어나 [훈몽서지행방편(訓蒙書知行方編)]을 저술하여,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상원(相元)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인구 편집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4,327명이 있었다. 2000년 통계청 발표 5,565가구에 총 18,158명으로 되어있다 2000년도 기준 통계청 발표내용 지역별 금릉김씨 인구 분포도 서 울 1,365가구 4,302명. 부 산 500가구 1,682명. 대 구 322가구 1,122명 인 천 298가구 974명. 대 전 141가구 854명. 울 산 100가구 360명 경 기 1,033가구 3,395명. 강 원 83가구 259명. 충 북 287가구 840명 충 남 197가구 607명. 경 북 207가구 655명. 전남(광주) 120가구 377명 경 북 360가구 1,250명. 경남(울산) 288가구 1,006명. 제 주 15가구 4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