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지
김덕지(金德摯):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6대 경순왕의 왕자.
김덕지(金德摯, ?~?)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왕자이다.
김덕지
金德摯 | |
---|---|
신라의 왕자 | |
부왕 | 신라 경순왕 |
이름 | |
휘 | 김덕지(金德摯) |
별호 | 범공(梵空) |
군호 |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
신상정보 |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미상 |
사망일 | 미상 |
사망지 | 미상 |
성별 | 남성 |
왕조 | 신라 |
부친 | 신라 경순왕 |
모친 | 죽방부인[1] |
형제자매 | 마의태자 |
종교 | 불교 |
개요 편집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김덕지는 신라 경순왕의 별자(別子)로, 학성부원군에 봉작되어 울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학성은 울산의 별호이다.
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이 고려에 신라의 천년사직을 양국하려 하자 그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2][3]
이후 화엄종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어 법수사와 해인사에 드나들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은 범공(梵空)이라 한다.[4][5][6]
김덕지는 왕자의 신분으로 경순왕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 태조에 양국하려 할 때 불가함을 극력 간하는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형 마의태자와 함께 마지막까지 절조를 지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7]
14세손 김환(金環)이 고려 시대에 삼중대광 광록대부에 이르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짐에 따라, 후손들이 본관을 울산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8]
관련 문헌 편집
- 《삼국유사》 :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 항복하자, 경순왕의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이름을 범공이라 했는데, 이후 법수사와 해인사에 있었다.[9]
- 《동국여지승람》 : 사서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왕자가 있었는데, 그도 왕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극력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매 처자를 버리고 형 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 《증보문헌비고》 : 경주 김씨 편에 "경순왕의 별자(別子) 덕지(德摯)는 울산으로 분적하였다. 손자 운발(雲發)은 나주로 분적하였다."라고 하였다. 울산 김씨 편에 "시조 덕지(德摯)는 신라 경순왕의 별자(別子)이다."라고 하였다. 나주 김씨 편에 "시조는 운발(雲發)이다. 신라 경순왕의 계자는 역사에 그 이름이 실전되었고 신라가 멸망하자 머리를 깎고 범공(梵空)이라는 승명으로 해인사에서 살다 죽었다. 입산 전 운발(雲發)이라는 아들을 두었다."라고 하였다.
- 《해인사지》 :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막내아들 김덕지가 중이 되어 법수사에 들어가 이곳 해인사에도 드나들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하였다.[10]
후세 평가 편집
-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마지막까지 절조를 지킨 그의 행동은 조선조에 들어와 유교적 대의 명분론에 비추어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다.
- 《동사찬요》 : 왕자가 신라를 고려에 양국 하는 것에 반대하며 개골산에 들어간 것에 대해 "왕자의 의열은 중국 촉한 멸망 시 북지왕 유심(劉諶)과 더불어 일월의 빛을 다툴 만한데, 이름이 동방의 문헌에 매몰되어 전하지 않으니 애석하다"고 하였다.[11]
- 《동사강목》 : “그 왕자가 없었더라면 천년 군자의 나라가 마침내 남의 비웃음이 되었을 것이니 그 간책을 빛나게 한 것이, 어찌 한때 남면하여 임금 노릇한 영광과 비교되겠는가?” 하였다.[12]
야사 편집
-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전설 : 경순왕의 장녀 덕주 공주(德周公主)는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은거하러 가던 도중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부근에 정착하게 되었고 마애불이 있는 이곳에 절을 세웠으니 공주의 이름을 따 덕주사(德周寺)로 불리게 되었다. 덕주 공주가 아니라 경순왕의 별자 덕지라고도 하나 이름이 비슷해 와전된 듯하다.
- 《김신대(金信臺)》 설화 :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전해져 오는 설화로,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자 경순왕의 둘째아들은 해인사에 들어가 범공이라는 승려가 된 뒤, 만년에 문수산 남쪽 자락 남암산에 들어와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이 절의 이름이 '김신암'이다. 또 암자 근처에 ‘김신대라는 돈대를 만들어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지금은 암자의 흔적과 왕자가 사용했다는 석조만 남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13][14]
주요 후손 편집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 ↑ 일설에 할머니라 한다.
- ↑ [1] Archived 2021년 10월 18일 - 웨이백 머신 [정복규의 성씨순례] 새전북신문 2013년 9월 24일
- ↑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국사편찬위원회
- ↑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덕지(金德摯
- ↑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해인사지》, 국사편찬위원회
- ↑ [3] Archived 2020년 6월 30일 - 웨이백 머신 [대전 중구청 효월드] 울산김씨 시조 김덕지(金德摯
- ↑ [4] [정복규의 성씨순례] - 인촌과 울산김씨 익산신문 2010년 5월 31일
- ↑ [5] [장성 울산김씨 문정공 하서종가 / 필암서원] 남도일보 2020년 5월 21일
- ↑ 국사편찬위원회:[6] 《삼국유사》 권2 기이편
- ↑ [7] [相生의 땅 가야산] (34) - 나라 잃은 왕족들의 원한 매일신문 2008년 3월 3일
- ↑ 조선시대 문신 오운이 1606년에 저술한 역사서
- ↑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안정복이 1756년~1778년 사이에 완성한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를 다룬 통사적인 역사서
- ↑ [8] [울산의 설화] 6. 무거와 김신암 울산매일 2014년 10월 8일
- ↑ 1786년(정조 10) 제작된 울산읍지(蔚山邑誌)에 “문수암(文殊庵) 남쪽 3리에 김신암(金信庵)이라는 절이 있는데, 신라왕의 소창(消暢)이라 한다.”고 하였는바 그때까지 절이 실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외부 링크 편집
- 위키미디어 공용에 김덕지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김덕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