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방씨(南陽房氏)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1세조 방계홍(房季弘)이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올랐다.

남양 방씨
南陽房氏
나라한국
관향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시조방준(房俊)
원시조방현령(房玄齡)
중시조방계홍(房季弘)
집성촌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자용리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가양리
주요 인물방서란, 방사량, 방구행, 방구달, 방옥정, 방귀원, 방귀화, 방귀온, 방응현, 방복령, 방원진, 방원량, 방원정, 방진태, 방례원, 방경원, 방극윤, 방희석, 방극성, 방하남, 방수원, 방준혁, 방시혁, 방효진, 방철용, 방예린
인구(2015년)27,454명
비고남양방씨 대종회

기원 편집

 
제요(帝堯)

방(房)씨는 중국 청하(淸河)에서 계출된 성씨이다. 요(堯) 임금의 아들 단주(丹朱)가 방후(房侯)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국명을 성으로 삼았다.

당 태종 때 재상인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 578년 ~ 648년)의 둘째 아들이며, 당 태종의 부마도위인 방준(房俊)이 643년(당 태종 정관 17년) 고구려 보장왕의 주청(奏請)으로 당나라 8학사 중 한 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동래하여 당성(唐城: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정착하면서 남양 방씨(南陽 房氏)의 기원이 되었다.

역사 편집

 
방현령(房玄齡)

중시조 방계홍(房季弘)이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올랐다.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청원리의 당성 숭령사에서 향사한다.

방계홍의 아들 방의강(房儀康)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으며, 손자 방진유(房珍儒)는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로 예부상서(禮部尙書)를 겸하였고, 다른 손자 방정유(房貞儒)는 대광(大匡)을 역임하였다.

분파 편집

남양 방씨는 방계홍(房季弘)을 1세조로 하고, 9세 직제학 방사량(房士良), 장사랑(將仕郞) 방사인(房士仁), 방사보(房士輔)의 아들 대(代)인 10세를 파조로 하여 크게 7개 파로 갈라진다.

  • 9세 방사량(房士良) - 직제학(直提學)
    • 10세 방구행(房九行) - 한림공파(翰林公派)
    • 10세 방구달(房九達) - 제학공파(提學公派)
    • 10세 방구성(房九成) - 정산공파(定山公派)
  • 9세 방사인(房士仁) - 장사랑(將仕郞)
    • 10세 방구녕(房九寧) - 판관공파(判官公派)
    • 10세 방구련(房九連) - 교위공파(校尉公派)
  • 9세 방사보(房士輔)
    • 10세 방구형(房九亨) - 참봉공파(參奉公派)
  • 9세 방춘천(房春天)
    • 10세 방옥심(房玉心) - 학생공파(學生公派)

정산공파(定山公派)는 14세에서 창평공파(昌平公派), 만호공파(萬戶公派), 봉사공파(奉事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사계공파(沙溪公派), 한성공파(漢城公派), 금서공파(錦西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분파된다.

인물 편집

  • 방서란(房瑞鸞) : 선주(宣州)의 향공진사(鄕貢進士) 출신이다. 1176년(명종 6년) 조위총의 난이 진압되는 데 기여하여 형 방효진(房孝珍)은 산원(散員)에 오르고, 방득령(房得齡)은 선주 호장(戶長)에 임명되었다.
  • 방연보(房衍寶) : 1197년(고려 명종 27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1]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에 방연보(房衍寶)에 대한 화답시가 실려 있다.
  • 방사량(房士良) : 상호군(上護軍) 방주(房柱)의 아들. 1377년(고려 우왕 3년)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전의시승(典醫寺丞)을 지냈다. 1391년(공양왕 2년) 중랑장으로서 시무 11조를 올리고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임명되었다.[2]
  • 방구행(房九行, 1381년 ~ ?) : 1420년(세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1455년(세조 2년)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 방구달(房九達) : 1414년(태종 14년)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 이조좌랑(吏曹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을 역임하였다.
  • 방옥정(房玉精) : 방구행의 손자이자 인천교수(仁川敎授) 방유륜(房有倫)의 아들이다. 1469년(예종 1)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472년(성종 3) 춘당대시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정5품 세자시강원 문학을 역임하였다.[3]
  • 방귀원(房貴元, ? ~ 1469년) : 정산현감(定山縣監) 방구성(房九成)의 손자이며, 판관 방순문(房恂文)의 아들. 1465년(세조 11)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가 되었다.
  • 방귀화(房貴和) : 1469년(예종 1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역임했다.
  • 방귀온(房貴溫, 1465년 ~ ?) : 방구성(房九成)의 손자이며, 사정(司正) 방계문(房戒文)의 아들. 1495년(연산군 1) 진사가 되고, 1518년(중종 13) 유일(遺逸)로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1538년 이조판서 윤인경(尹仁鏡)의 상소로 인하여 신원(伸寃)되었다. 벼슬은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 방응현(房應賢, 1524년 ∼ 1589년) : 방귀화의 손자. 아버지 방한걸(房漢傑)은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이 묘비명을 작성하였다. 자는 준부(俊夫), 호는 사계(沙溪)이다. 조식(曺植)·이항(李恒)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닦았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향리의 사계천(沙溪川) 위에 집을 짓고 일생을 송시(誦詩)와 독서로 자적(自適)하는 가운데 과농(課農)·이포(理圃)·관개(灌漑)·화죽(花竹) 등 농학분야의 생리문제(生理問題)에 관심을 두었다.
  • 방응청(房應淸) : 중직대부(中直大夫) 예산현감(禮山縣監)을 역임했다. 외손자는 예조정랑 하응림이다.
  • 방복령(房復齡, 1562년 ∼ ?) : 방응청의 손자. 아버지는 1546년(명종 1년) 생원시에 급제하여 정3품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된 계운(季雲) 방덕린(房德麟).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호위하여 선전관(宣傳官)에 특채되었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나 선전관청(宣傳官廳)의 현판을 썼다. 1601년(선조 34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습독관(訓練院習讀官)‧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제주판관(濟州判官) 등을 역임하였고, 강상현감(康翔縣監)을 지내던 중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정사가 혼란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 방원진(房元震, 1577년 ~ 1649년) : 방응현의 손자. 부인은 현감 정대민(鄭大民)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대박(梁大撲)과 함께 의병으로 활동했다. 1605년(선조 38)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신흠(申欽)의 천거로 중림찰방(重林察訪)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호소사(號召使) 김장생(金長生)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으로 군사와 군량미를 모집하였다.
  • 방원량(房元亮) : 16세. 참판 방덕유(房德騟)의 아들. 1618년(광해군 10년)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과천에서 적을 물리쳤다. 1638년(인조 16)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 1641년(인조 19) 의금부 도사(都事)를 역임하고, 1642년 창평현령(昌平縣令)이 되었다.[4] 첫째 부인은 함평 이씨(咸平李氏) 이득원(李得元)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영의정 황희(黃喜)의 6세손 황진(黃進, 1550년 ~ 1593년)의 아들인 교동현감(喬桐縣監) 황정열(黃廷說)의 둘째 딸이다.
  • 방원정(房元井, 1593년 ∼ 1652년) :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분개하여 의병과 군량을 모아 전주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주(淸州)에서 적을 격파하고 과천(果川)에 이르러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적을 무찔렀으나 강화 소식이 전해지자 의병을 파하였다. 1646년(인조 24) 문과에 급제한 후 삼례찰방(參禮察訪)에 임명되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국가의 시장정책(市場政策)의 허점을 지적하며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나라가 부강해지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외에도 외교정책(外交政策) 등 다방면에 깊은 식견을 지녔다. 저서로 『지족와집(知足窩集)』이 있다.[5]
  • 방진형(房鎭馨, 1869년 ~ 1919년) : 독립운동가. 1968년 대통령표창 추서.
  • 방양규(房亮圭, 1879년 ~ 1919년) : 독립운동가. 1968년 대통령표장,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방례원(房禮源, 1918년 ~ 1992년) : 제15대 서울고등법원장.
  • 방경원(房景源, 1926년 ~ 2011년) : 제3대 병무청장.
  • 방극윤(房極允, 1939년 ~ ) : 서울지방노동청장. 근로복지공단 이사장.
  • 방희석(房熙錫, 1951년 ~ ) : 중앙대학교 교수. 제3대 여수광양항만공사 사장.
  • 방춘원(房春源, 1955년 ~ ) : 제67대 김제경찰서장.
  • 방극성(房極星, 1955년 ~ ) : 제47대 전주지방법원장. 제34대 광주고등법원장.
  • 방하남(房河男, 1957년 ~ ) : 제4대 고용노동부 장관.
  • 방봉혁(房峰爀, 1962년 ~ ) : 서울고등검찰청 검사.
  • 방기태(房基泰, 1967년 ~ ) : 前 서울북부지방검찰청 부장검사.
  • 방준혁(房俊爀, 1968년 ~ ) : 넷마블 의장.
  • 방시혁(房時爀, 1972년 ~ ) : 하이브 의장.
  • 방효진 : 배우 고은아
  • 방철용 : 가수 엠블랙 미르
  • 방예린 : 배우 설인아

과거 급제자 편집

남양 방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9명, 무과 급제자 9명, 사마시 34명 등 과거 급제자 52명을 배출하였다.

고려 문과

방연보(房衍寶) 방중량(房仲良)

문과

방구달(房九達) 방구행(房九行) 방귀온(房貴溫) 방귀원(房貴元) 방문중(房文中) 방옥정(房玉精) 방원정(房元井) 방윤익(房允翼) 방철모(房喆謨)

무과

방두기(房斗紀) 방복령(房復齡) 방선남(房善男) 방시원(房時騵) 방시유(房時騟) 방애정(房愛丁) 방응두(房應斗) 방태신(房泰臣) 방호생(房好生)

생원시

방귀화(房貴和) 방길원(房吉元) 방덕린(房德麟) 방덕준(房德駿) 방두위(房斗緯) 방명소(房明熽) 방명수(房明秀) 방세기(房世機) 방수인(房洙仁) 방연록(房延祿) 방옥정(房玉精) 방원진(房元震) 방위원(房緯元) 방윤(房允) 방태근(房泰謹) 방태옥(房泰) 방태하(房泰河) 방호인(房好仁)

진사시

방귀온(房貴溫) 방귀화(房貴和) 방명섭(房明燮) 방명엽(房明燁) 방명욱(房明煜) 방명진(房明晉) 방명훤(房明烜) 방언우(房彦佑) 방옥정(房玉精) 방원량(房元亮) 방원정(房元井) 방처인(房處仁) 방태연(房泰淵) 방필언(房弼彦) 방하규(房夏圭) 방호인(房好仁)

항렬자 편집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口상(相) 환(煥) 口규(圭) 진(鎭) 口원(源) 극(極) 口혁(爀) 기(基) 口석(錫) 치(治) 口모(模) 현(炫) 口곤(坤) 연(鉛) 口수(洙) 환(桓) 口렬(烈) 균(均)

문화재 편집

  • 사계정사(沙溪精舍) :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에 있는, 남양 방씨의 선조 방응현(房應賢)이 조선 중기에 처음 세운 정자이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6호.
  • 유천서원(楡川書院) : 1830년(순조 30)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서원으로 방사량(房士良)·방귀온(房貴溫)·안탁(安琢)·방응현(房應賢)·안창국(安昌國) 등 5현을 봉안하여 5현사(五賢詞)라고도 부른다.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52호.
  • 남양방씨 분재기 및 교지․교첩류(8점) : 남원에 세거한 대표적 양반가 남양방씨 문중에는 분재기를 비롯한 교지, 교첩, 소지, 명문, 호적단자 등 100여점이 넘는 고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중 8점은 17~18세기 자료들이다. 1619년 분재기는 가선대부 방덕유가 적자 1남 1녀와 서자 1남에게 재산을 분급한 것으로 딸에게도 상당히 많은 재산을 물려주고 있고, 시기적으로 임진왜란 직후로 남녀균등상속에서 적장자 위주의 상속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분재기이다. 2016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본관 편집

남양(南陽)은 경기도 화성시(華城市) 남양읍 일대의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당성현(唐城縣)이다. 신라가 757년(경덕왕 16)에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쳤고, 822년(헌덕왕 14)에 수성군(水城郡)에 병합되었으나 829년(흥덕왕 4)에 당성진을 설치하면서 분리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당성군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 수주(水州)의 관할에 들었고, 후에 인주(仁州)의 영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독립하여 감무를 두었다. 1290년(충렬왕 16)에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로 승격되었고, 익주목(益州牧)이 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가 되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남양도호부가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기도 남양도호부의 토성(土姓)으로 (洪)·송(宋)·방(房)·박(朴)·최(崔)·(徐) 6성이 기록되어 있다.[6]

1896년에 경기도 남양군이 되었다. 1914년 수원군에 병합되었다가 1949년 수원시가 분리되면서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2001년 화성시로 승격되었고, 시청 소재지는 남양읍이다.

집성촌 편집

인구 편집

  • 1985년 22,519명
  • 2000년 22,496명
  • 2015년 27,454명

각주 편집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