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 (서울)
역사 편집
한명회에 따르면 조선 도읍을 한성으로 정할 때 북악산의 불 기운을 잡기 위해 숭례문 밖에 못을 팠다고 한다.[1]
이기룡필 남지기로회도(17세기)를 보면 연꽃을 심은 연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19세기)에 따르면 남지는 역사상 여러 차례 말랐다가 다시 물을 채워넣은 일이 있었는데, 못에 물을 채워넣을 때에는 남인이 흥한다는 속설이 있었다고 한다.[2]
을사조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가 콜레라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메웠다.[3]
지금은 터 근처 도로에 표지석이 남아 있다.
각주 편집
- ↑ 〈성종 13년 11월 9일 계묘 2번째 기사〉. 《성종실록》 148권. 1482년 음력 11월 9일.
韓明澮啓曰: "臣聞 ‘我國都主山, 乃火山。’ 故當初定都時, 慕華館前及崇禮門外, 皆鑿池以鎭之。"
- ↑ 〈이문(里門)과 흥인문(興仁門)에 대한 변증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17세기.
- ↑ 노주석 (2014년 6월 29일).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8> 한양도성(하)”.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