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심가(丹心歌)는 고려 말기, 조선 초기에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지은 시조이다.

내용 편집

단심가는 《청구영언》과 《가곡원류》의 각 이본에 두루 실려있다. 그밖에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일석본(一石本)과 주씨본(周氏本) 《해동가요》 · 《시가(詩歌)》. 서울대학교본 《악부(樂府)》 · 《근화악부(槿花樂府)》 · 《동가선(東歌選)》 · 《해동악장(海東樂章)》 · 《협률대성(協律大成)》 · 《화원악보(花源樂譜)》 · 《대동풍아(大東風雅)》 등에도 실려 있다. 《고금가곡(古今歌曲)》 · 《영언유초(永言類抄)》 · 《흥비부(興比賦)》 등에는 작자를 밝히지 않고 실었다. 《포은집(圃隱集)》 · 《해동악부(海東樂府)》 · 《약천집(藥泉集)》 · 《순오지(旬五志)》 · 《조선악부(朝鮮樂府)》 · 《소문쇄록》 등에는 한역시가 전한다.[1]


  • 한역








  • 옛 한글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이 塵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一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 해석

이 몸이 죽고 또 죽어
백 번이나 다시 죽어
백골(白骨)이 흙과 먼지가 되어
넋이야 있건 없건
임금님께 바치는 충성심이야
변할 리가 있으랴?


《포은집(圃隱集)》에는 한역(漢譯)되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라고 실려 전한다.

배경 편집

단심가는 고려왕조가 멸망할 무렵, 뒤에 조선조 태종이 된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초대한 자리에서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그 마음을 떠보았다. 이에 대하여 응답하여 지은 것이 이 노래이다. 이방원은 만수산 드렁칡과 같이 서로 얽혀 백년까지 누리자고 하였다. 이 말을 받아 정몽주는 일백 번 고쳐 죽더라도 뜻이 변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조선조 개국과정에서 반대파의 주장을 대변하였던 이 노래가 개국 후에는 신하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노래로 널리 퍼졌다. 조선조가 내세운 유교적 지배질서와 부합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노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묘미있는 표현을 개척함으로써, 고려말 새로운 갈래로 등장한 시조가 정착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한국사전연구사(1998년)

참고 자료 편집

  • 『포은집(圃隱集)』
  • 『해동악부(海東樂府)』
  • 『한국문학통사』, 조동일, 지직산업사(1992년)
  • 『한국시가문학사(詩歌文學史)』, 박을수, 아세아문화사(1997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단심가, 한국학중앙연구원(1998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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