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초월
백초월(白初月, 1878년 2월 17일 ~ 1944년 6월 29일)은 대한민국 일제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백인영(白寅榮), 초월은 법호이다. 법명은 동조(東照)이다.
백초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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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동조(東照) |
출생 | 1878년 2월 17일 조선 경상도 고성군 |
입적 | 1944년 6월 29일 | (66세)
출가 | 1890년 영원사 |
칭호 | 법호 초월(初月) |
직업 | 승려, 독립운동가 |
상훈 | 1986년 건국포장 추서 1990년 애국장 추서 |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출생하였으며, 13세에 출가하여 영원사로 들어가 공부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불교계를 이끌던 한용운과 백용성이 체포되자, 초월은 그들의 뒤를 이어서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를 발표하고 의용승군제를 추진했다.
생애[1] 편집
경상남도 고성군 출생으로, 13세에 지리산 영원사에서 출가하여 불문에 입문했다. 1916년 명진학교(明進學校) 교장을 지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서울 중앙학교(中央學校)를 근거로, 항일의식을 고양할 목적으로 인쇄물을 간행한 한국민단부(韓國民團部)의 부장을 맡았다. 그 해 7월, 항일신문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간, 사장으로 활약하며 신문을 상해임시정부 및 길림성(吉林省)의 독립군에 보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천은사(泉隱寺)·화엄사(華嚴寺) 등 각처의 사찰을 통해 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국내의 애국청년들을 뽑아 길림(吉林)의 독립군 및 상해임시정부로 파견하였다.
건국기념일(개천절)인 11월 25일(음력 10월 3일), 보성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시내 각 학교 학생들이 참가한 시위계획 때, 선언서에서 이강(李堈)·김가진(金嘉鎭)·나창헌(羅昌憲) 등과 함께 대한민족대표(大韓民族代表)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신상완(申尙玩)이 주도, 조직한 승려결사인 의용승군(義勇僧軍)에도 관계하여 지원금을 제공하였다. 또 상해임시정부 명의로 채권을 발행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도중에 일본 경찰에 잡혔다.
다음 해 2월에는 제자 이중각(李重珏)을 통하여 일본 유학생들이 주도한 3·1운동 1주년 기념시위에 관여하다 1920년 3월 동경(東京)에서 잡혀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다.
이 때 모진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된 뒤부터 미치광이로 행세하며 활동하다 여러 차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그 때마다 정신이상자로 석방되었다. 기인(奇人)으로서의 생활을 계속해, 죽은 거북이 한 마리를 방 안에 놓고 대화하는 시늉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 중에도 친일 승려를 규탄하며 독립의 의지를 강하게 나타냈고, 종교의 통일을 위해 일심교(一心敎)를 제창하기도 하였다.
1939년 백초월이 거처하던 마포포교소 신도가 만주로 탈출하던 중 봉천행(奉天行) 화물열차에서 ‘대한독립만세’라고 낙서한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잡혔다. 그 뒤 마포·대전 형무소를 거쳐 청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판결문이 없어 형기를 알지 못함.) 옥사하였다. 청주 금천동 형무소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6·25전쟁 때 유해가 없어지는 사후의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
사후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자료 편집
각주 편집
- ↑ 조동걸 (1997). “백초월(白初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9년 3월 12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