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곰돌이인형/연습장

한국 현대시사(문학) 편집

한국 현대시는 근대시라고도 명명되며, 정형시의 율격을 벗어난 자유시와 산문시를 말한다. 한국 현대시사는 191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현대시가 변화해 온 역사이다. 이 문서는 191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현대시사를 주로 기술한다.

개요 편집

한국 현대시는 1910년대부터 등장하여 현재 2000년대까지 이어지며 변화하고 있다. 한국 현대시는 각 시대적 상황이 변화할 때마다 그 모습과 추구하는 경향이 달리 나타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한국 현대시사의 시대구분은 1910년대부터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로 구분된다.

1910년대 편집

1910년대는 한국 현대시가 시작된 시기이다. 1910년대 후반, 최초로 이전의 정형시의 율격을 벗어난 자유시로서의 현대시가 등장한다. 초창기 현대시로서 평가를 받는 시 중 하나는 1919년에 <창조>라는 문예지에 실린 주요한의 '불노리'이다. 주요한의 '불노리'는 이전의 정형적 구조에서 벗어나 자유형식을 추구하며 자유시는 창조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1] 주요한과 함께 김억김동환도 정형시의 율격에서 벗어나 자유시를 창조하고자 하였다. 김억의 초창기 현대시 작품으로는 1918년 <학지광>이라는 문예지에 실린 '야반'이라는 작품의 근대성이 인정받으며 현대시로 불리고 있다.

1920년대 편집

1910년대가 현대시가 태동하던 시기라면, 1920년대는 현대시가 나타나며 다양하게 변화하는 시기이다.

1920년대의 시는 1910년대의 최남선 등의 신시(新詩)에 대한 거부와 반동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1920년 대의 시들은 주로 교훈시에 반발하는 순수한 서정시를 지향하였고, 다양한 문예지에서 그 모습을 보인다. 1920년에는 <폐허>라는 문예지가 발간된다. 이 문예지는 1920년의 세기말적 사상의 영향으로 퇴폐성을 짙게 띄고 있다. 주요 시인으로는 김억이 있다. 1922년에는 <백조>라는 문예지가 발간된다. 이 문예지에 참여한 시인들은 낭만주의를 따른 젊은 시인들이다. 이때 <백조>의 낭만주의와 서구의 낭만주의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백조>의 주요 시인으로는 '나의 침실로'의 이상화, '사의 찬미'의 박종화, '월광으로 짠 병실'의 박영희가 있다. 이러한 1920년대 전기의 시는 1910년대의 정신을 거부하고 나섰지만 세기말 사상과 3.1운동의 실패와 같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퇴폐주의와 허무주의의 영향으로 결국 주관주의와 감상주의로 빠져들었다. 이 경향의 작품들 가운데서 비교적 문학적 성취에 도달한 것은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다. '나의 침실로'는 감정이 과잉 노출되며, 진술이 사변적이라는 지적이 있긴 하지만 당시에 이 작품만큼 식민지 현실을 미학적으로 풀어낸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미학적인 공간에서 꿈만 꾸는 듯한 시들을 비판하는 경향이 등장하며, 현실 지향적인 시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한 경향으로 민족주의 시가 등장하였다. 민족주의 시는 다시 민요시파와 민족서정시파 시조부흥시파 등으로 나뉘는데, 이들의 공통적인 목표는 신화, 전설, 민담 등과 같은 민족의 정신유산에 내재되어 있는 민족혼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켜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민요시파는 시를 전통 민요정서, 율격, 형태, 시어 등에 바탕을 두고 쓰고자 했던 일련의 시인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김소월, 김억, 홍사용, 주요한 등의 시인이 있다. 민요시파 시인들 중 대표적인 시인은 '진달래꽃'을 쓴 김소월이다. 김소월은 한국인의 민족적 정서와 당대의 국민감정을 전통적 가락과 결합시키는 데 성공한다. 또한 그의 시에는 님의 상실과 함께 허무의식이 나타나는데, 이는 민족공동체적의미를 띈다. 민족서정시파는 자유시의 형식으로 민족적 서정이나 이념을 형상화 한 시인들을 지칭한다. 시인들로는 한용운, 양주동, 변영로 등이 있다. 민족서정시파의 대표적인 시인은 '님의 침묵'을 쓴 한용운이다. 한용운의 시에는 그가 깨달은 불교적 사상에 대한 내용이 잘 드러나, 사상적으로 그 뛰어남이 인정받는다. 시조부흥시파는 조선의 시조를 현대시로 부흥시켜 이를 통해 민족혼을 일구고자 하는 몇몇 시인들을 지칭한다. 시인들로는 최남선과 이광수 등이 있다. 시조부흥시파의 시인 중 한 명은 최남선으로 그는 1910년대에 주로 신체시창가를 창작하다가 이후 '국민문학론'을 제창하면서 시조부흥운동을 주도했다.

1925년에는 KAPF라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이 결성되었다. 카프는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운동으로서의 문학을 창작하고자 한 사람들의 동맹이다. 카프의 창립자는 박인회와 김기진이다. 이들은 1925년부터 카프를 이끌어나갔지만, 이후 임화가 그 두 사람을 제치고 카프를 이끌게 된다

1930년대 편집

1930년대에는 사회적인 배경과 문학 자체의 요인으로 현실 지향의 시들이 아닌 순문학적 태도를 지닌 시들이 향유된다. 이때 한국 현대시의 기반이 되는 세 가지의 시파가 등장하며 시단이 발전하는 시기이다. 이 세개의 시파는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첫 번째 시파는 순수 서정시이다. 이 시기의 순수 서정시파는 시문학파와 생명파 두 갈래로 나뉜다. 시문학파는 새로운 한국 현대시의 길을 마련했다는 평을 받는다. 시문학파가 가진 시사적 의의와 현대적 성격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2] 첫 번째로 그들이 가진 순수한 서정시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이전 시기의 시인들이 그랬듯이 외국의 이론만을 급급하게 들여온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심화된 정감을 한국적인 운율로 재구 성하는 자각이 뚜렷했으며 청신(淸新)한 감각적 표현을 위한 방법론이 있었다. 시문학파의 순수한 서정시에 대한 의식은 순수 서정시에 대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으며, 시의 본령을 지키게 해 주었다. 또한 시문학파는 시에 있어서 가장 적당한 표현을 고민하며 시어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였다. 이들 탐구의 과제는 시적 언어를 다시 가다듬는 것이였고, 이는 시문학파가 시단에 미친 큰 공헌이었다. 시문학파는 <시문학>이라는 문학잡지를 발간하며, 이를 바탕으로 그들의 시를 보인다. 시문학파를 이끈 대표적인 두 시인은 김영랑박용철이다. 김영랑은 개성적 정서를 한국적 운율로 재구성하는 데 주력한 시인으로, '제야'와 같은 시를 썼다. 박용철은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인생론적 감흥을 감상적으로 노래 한 시인으로, '떠나가는 배', '싸늘한 이마' 등의 시를 썼다. 생명파는 모더니즘이나 아방가르드 운동에 반동하는 움직임을 가진 시파로, 이들은 시에서 직정적인 생의 목소리를 가식 없는 언어로 담고자 하였다. 생명파를 이끈 대표 시인으로는 '자화상'을 쓴 서정주, '깃발'의 유치환, '해바라기의 비명'의 함형수가 있다.

두 번째 시파는 모더니즘이다. 이 시기의 모더니즘은 네 가지 경향으로 분류가 된다. 첫째는 다다이즘 경향으로 김니콜라이, 임화, 정지용과 이상과 같은 시인들이 포함되나, 이들은 거의 바로 다른 경향으로 나아갔고, 현대시사에서 이 경향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둘째는 초현실주의 경향으로 인간의 잠재의식에 떠오르는 내면풍경을 시에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 경향의 시인으로는 이상, 이시우, 신백수 등이 있다. 셋째는 이미지즘 경향으로 영미의 이미니즘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모든 의미적 요소를 최대한 감각화하고자 하였다. 시인으로는 정지용, 김광균, 장만영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주지주의 경향으로 그들은 지적인 감수성으로 문명사 의식을 시에 형상화하고자 했으며, 관련 시인으로는 김기림, 오장환 등이 속한다. 한편, 1930년대의 모더니즘은 다른 예술들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 된다. 김기림을 제외한 다른 시인들이 시와 영화와의 관련성을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당시의 시와 영화와의 관련성은 매우 컸다.[3] 1930년대의 모더니즘을 주로 이끈 집단은 구인회였다. 구인회의 구성원에는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시에서의 모더니즘을 잘 드러내었다. 모더니즘의 대표 시인으로는 정지용으로 그의 시에서는 모더니즘적 경향이 잘 드러난다. 정지용은 당시 시각으로는 가장 완벽한 서구어를 구사했다는 평을 받으며 대표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된다. 모더니즘이 잘 드러난 그의 작품으로는 '카페프란스'가 있다.

세 번째 시파는 리얼리즘이다. 리얼리즘은 현실주의나 사실주의로 명명되기도 한다. 이 시파는 순수 서정시파나 모더니즘 시파처럼 많은 시인들이 활동한 것은 아니나, 1930년대에 의미있는 시파 중 하나이다. 리얼리즘의 대표 시인으로는 '오랑캐 꽃'이나 '국경'을 쓴 이용악이 있다. 이용악은 식민지 차하에서 짓밟혔으나 계속해서 일어서는 민중의 생명력을 사실적으로 노래하고자 하였다. 또 다른 시인으로는 백석이 있다. 백석은 몇 편의 이미지즘적 작품을 남겨 모더니즘 경향의 시인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평안도 지방의 향토적인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린 시를 많이 썼다. 대표작으로는 '가즈랑 집', '여우난 곬'등이 있다.

1940년대 편집

1940년대에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와 식민지화가 극대화 된 시기로 우리 민족의 가장 혹독한 시련기였다. 이 시기에 일제 총동 정치는 문인들에게 문필보국의 명분을 내세워 조직적으로 친일 문학을 강요하였으며, 백철과 같은 사람은 이 시기를 일컬어 '암흑기'라고 규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문인이 취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였다.[4] 첫째, 일제에 굴복하여 친일 문학을 창작하는 길, 둘째, 일제와 맞서 싸우며 일제에 저항하는 시를 쓰는 길, 세 번째는 문학 그 자체 속에 칩거하며 절필을 하는 길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일제의 강요에 못이겨서 혹은 자발적으로 친일을 하였으며, 일부의 시인만이 절필을 함으로써 소극적으로나마 일제에 저항하였다.

먼저 친일시인들은 국민시[5]라는 친일 문학을 창작하였다. 이러한 국민시의 요건에 따라 시 창작활동을 한 시인들로는 '군복 깊는 각씨네'를 쓴 김동환, '부인노동대'를 쓴 노천명, '동방의 여인들'을 쓴 모윤숙, 그리고 '무제'를 쓴 서정주가 있다.

저항시를 쓴 저항시인으로는 이육사와 이상화, 심훈이 있다. 이육사는 겉으로 드러나는 저항시보다는 시 안에 조선인의 정신과 기개를 담아내었다. 심훈은 '그날이 오면'에서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는 그날이 오면 환희에 찰 자신의 모습을 시로 그려냈다. 윤동주는 등단하지 못한 학생문사이다. 그는 적극적인 저항시인으로 평가되기는 어렵지만, 몇몇 평론가들은 그의 시에서 보이는 식민지 시인으로서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저항시인으로서의 면모로 평가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해당 시기에 절필을 한 시인으로는 박남수, 허민, 박두진, 조지훈 등이 있다. 몇몇의 평론가들은 윤동주를 저항시인이 아닌 절필 시인으로 보기도 한다.

암흑기에 민족시만이 아닌 순수시 또한 존재했다는 의견도 있다. 암흑기의 순수시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일제 국민시에 참여하지 않고 순수시만 창작한 경우로, 시인과 작품으로는 윤곤강의 '공작송', 박목월의 '월야' 등이 있다. 둘째는 일제 국민시에 참여하면서 한 편으로 순수시를 창작한 경우로, 시인과 작품으로는 서정주의 '거북이', 임학수의 '염소'등이 있다. 마지막 경우는 절필을 한 경우이다. 그러나 이러한 암흑기의 순수시는 극히 예외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의견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1945년 광복이후에는 해방기의 시라고 불리며, 한국 현대시는 많은 변화를 맞이한다. 이 시기는 정치적인 상황이 매우 급변했기 때문에 문인들 또한 정치적인 상황에 맞춰서 남쪽이나 북쪽 중 한 가지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시단에는 정치주의 시들이 창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신들을 인민민주주의 국가 건설의 선전, 선동가로 자처했던 일명 좌파계열의 시인들의 경우가 한층 격렬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좌파계열의 사회운동들이 제제를 받으며 국가적으로 금지되기 시작한다. 사회운동의 제재로 인해 사회운동으로서 시를 향유하던 좌파계열의 시인들은 월북 등의 방법을 택하며 남한 땅에서 사라진다. 대표적인 좌파계열의 시인으로는 카프의 활동 시인인 임화와 오장환, 유진오가 있다. 임화와 이용악, 오장환은 북으로 가는 길에 실종되었으며, 유진오는 지리산으로 간 이후 실종되었다.

사회운동의 금지에 따른 좌파계열 시인들의 부재로 한국 현대시에 공백기가 등장한다.이때 그 공백을 채운 시인들이 청록파 시인들이다. 청록파는 1930년대 순수 서정시파의 생명파에 이어 등장한 시파이다. 청록파 시인들은 <문장>잡지의 인사권을 갖고 있던 정지용에게 추천을 받아 등단한 시인들로 자연의 의미를 탐구한 일련의 자연시인들이었다. 청록파 시인에는 자연탐구 작품으로 평가받는 '승무'를 쓴 조지훈과 '나그네'를 쓴 자연을 객관적이며 서경적으로 바라본 박목월, 자연을 통해 생명의 율동을 확인한 '해'를 쓴 박두진이 있다.

1940년대에는 이들과는 또 다른 새로운 도시적 감수성을 지닌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모더니즘적인 경향을 추구하였으며,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문예지를 발간하였다. 대표 시인으로는 조향, 박인환, 김수영, 김규동 등이 있다. 또한, 김춘수, 조병화, 김윤성, 정한모 등과 같은 다양한 개성의 젊은 서정시인들이 등장했다. 이들의 시적 소재는 각기 달랐으나, 인생과 생활을 서정적으로 인식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앞선 경향과는 다른 그들만의 동일한 경향이 보인다.

1950년대 편집

1950년대에는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인해 시단이 피폐해진 시기였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시들은 다섯 가지의 경향을 추구하였다.

첫째는 전쟁시의 추구이다. 전쟁시에는 전쟁의 선전, 고발, 전쟁이 내면화 된 서정시 등이 포함되었다. 전쟁시를 쓴 시인들로는 전쟁의 선전에 대한 시를 쓴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모윤숙과 '전우에게'의 유치환, 전쟁에 대한 고발을 한 연작시인 '초토의 시'를 쓴 구상 등이 있다. 한편, 전쟁시를 쓴 시인들의 집단으로 '종군문인기자단'이 있었다. 이들은 전선을 오가며 그곳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시를 창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전쟁의 선전도구로서 사용되어서 문학으로서 큰 의의를 갖기에는 어렵다는 평을 받는다.

둘째, 아방가르드 및 모더니즘 시가 활발하게 쓰여졌다. 그러나 이 시기의 모더니즘은 1930년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고, 초현실주의적 경향의 확산과 1930년대에 비해 보편적인 사조로 정착되었다는 점에서 차이점은 있다. 이때의 모더니즘은 동인지 없는 동인 "후반기"를 중심으로 한 '목마와 숙녀'를 쓴 박인환, 김규동, 조향 등의 시인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셋째, 전통을 탐구하려는 시적 경향이 대두했다. 이는 외래사조의 유입과 전쟁으로 인한 민족적 정체성의 훼손 등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생한 경향이다. 이 경향에 속하는 시인들로는 서정주, 박재삼, 이동주 등이 있다.

넷째, 자연시의 경향이 나타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거나, 자연에 빗대어 인생을 이야기하는 시를 쓴 '자연친화적인 시'라고 표현할 수 있다. 박목월과 '도봉'을 쓴 박두진 등이 자연시인이다.

마지막으로 인생 및 생활의 서정시들이 등장하였다. 이들 시인들은 어떤 특정 경향성을 들고 나오지는 않았으나 삶의 여러 국면과 거기에서 유발되는 희노애락의 감정들을 서정적으로 인식하고자 하였다. 구상, 정한모, 김남조, 김종길 등이 이에 속한다.

1960년대 편집

1960년대에는 4.19 혁명5.16 군사정변이라는 큰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는 시단에도 영향을 주며 순수시 계열, 참여시 계열, 아방가르드 및 모더니즘 계열에서 다양한 시의 모습을 보인다.

순수시 계열은 문학성을 옹호하며 정치적인 문제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경향이었다. 이들은 전통적 서정시를 쓴 박용래, 허영자, 임보 등의 시인들과 동양사상을 탐구한 박제천 등의 시인과 인생론적 의미를 탐구한 시인으로 정진규, 박이도, 김종해 등이 있었다.

참여시 계열에서는 크게 두 가지 주제가 다루어졌다. 첫 번째 주제는 민주화이다. 1960년대는 독재정권이라는 시대의 영향에서 비롯되어 민주화라는 주제가 현대시에서 다루어졌다. 민주화에 대한 시를 쓴 대표 시인으로는 1960년 4.19혁명에 대한 시를 쓴 김수영시인이 있다. 두 번째 주제는 민족이다. 민족에 관련된 시를 쓴 대표 시인으로는 신동엽이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금강'이 있다. '금강'에는 민중의 아픈 삶과 함께 민중이 아니라면 실현할 수 없는 삶의 이상이 제시되어 있으며, 이는 민중성에서나 문학성에서나 모두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아방가르드 및 모더니즘 계열은 <현대시> 동인들인 김영태, 이승훈, 이수익 등에 의해서 창작되었다. 몇몇을 제외한 <현대시>동인들은 현대인의 분열된 자아를 시로써 형상화하고자 하였고, 그들은 이것을 '내면의식의 탐구'라 불렀다.

1970년대 편집

1970년대에는 박정희 정부의 시기로 군부독재와 유신헌법에 저항하는 민주화에 대한 시와, 근대화로 인한 농촌해체에 대한 시들이 대표를 이뤘다.

농촌해체에 대한 시는 신경림의 '농무'와 김준태의 '참깨를 털면서'가 있다. 이들은 1970년대 해체되어가는 농촌의 피폐해진 실상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민주화의 시인으로는 고은시인이 있다. 고은 시인은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유신반대 시를 작성하였다. 그의 '불길'이나 '새벽길'은 1970년대의 시대의식이 잘 드러내었다는 평을 받는다. 이외에도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조태일의 '국토', 양성우의 '겨울나그네'등이 민주화를 다룬 시로서 존재한다.

1970년대에는 농촌해체와 민주화를 다룬 시들 이외에도 다양한 내용의 시들이 창작되었다. 장영수의 '메이비'와 김명인의 '동두천'은 1970년대에 미국 위안부에 대한 문제를 최초로 다루었다. 김광규는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이라는 시를 통해 4.19세대가 세상 풍파에 물들어가는 세태를 비판하는 내용의 시를 작성하였다. 정희성은 1970년대 도시빈민에 대한 시를 썼으며, 송수헌은 '산문에 기대어'와 같은 서정적인 시를 창작하였다.

1980년대 편집

1980년대에는 그동안 계속해서 현대시의 장르를 이어오던 세 가지 시파인 순수 서정시와 모더니즘, 리얼리즘 중 모더니즘과 리얼리즘계열의 시가 크게 향유된다.

리얼리즘 시에는 다양한 시들이 등장하였는데, 노동시, 농민시 등이 있다. 이들은 민중시 계열의 시로 평가된다. 노동시는 노동계급의 해방이라는 구체적, 궁극적 목적을 지닌 계열의 시들이다. 해당 시인으로는 박노해와 김해화, 백무산이 있다. 박노해의 본명은 박기평으로 그의 이념적 사상은 필명의 의미는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1984년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로 문단에 등단하였는데, 이 시는 박노해 자신이 실제 섬유, 화학 등의 현장의 실제노동자로서 겪은 일들을 여과없이 그려낸 시로 그 안에서 보여지는 당대의 비참한 노동현실과 은폐되었던 산업화 과정의 민낯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김해화는 실제로 자신이 철근공으로 노동을 한 노동자로서, 자신이 겪은 노동현장을 시로 적었다. 김해화의 시로는 '인부수첩'이 있다. 백무산 또한 노동자 출신의 시인으로 '만국의 노동자여'라는 시를 썼다.

농민시는 농촌시라고도 이야기하며, 1970년대의 농촌시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1970년대의 농촌시는 해체되어가는 농촌에 대한 비애만이 드러났다면, 1980년대의 농촌시에는 농촌해체에 대한 비애와 함께 그에 대한 저항의식도 같이 드러났다. 농민시인으로는 '섬진강'을 쓴 김용택과 실제 농민으로서의 삶을 산 고재종이 있다.

1980년대에는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언급이 금기시되었던 것들에 대한 제재가 풀리는 시기였다. 제재가 완화됨에 따라 그에 대한 시들이 들장하기 시작했다. 오봉옥은 최초로 지리산 빨치산에 대해서 시를 썼으며, 이산하는 제주도 4.3사건에 대한 시인 '한라산'을 썼다.

모더니즘계열의 시는 1980년대에 두 시기로 나뉜다. 한 시기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으로 이 시기에는 암울하고 무거운 느낌의 모더니즘계열의 시가 등장하였다. 대표 시인으로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황지우, '독자놈들 길들이기'라는 시를 쓰며 주체의 변화를 시도한 박남철이성복최승자 등이 있다. 황지우와 박남철은 세부적으로는 다른 시를 썼으나, 현실 또는 사회를 미학적으로 공격한 이 시기의 몇 안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시기는 1980년대 중반으로 근대화 중반의 시기이다. 이때에는 앞 시기의 암울하고 무거운 느낌에서 가벼운 느낌의 모더니즘계열의 시가 등장하였다. 대표시인으로는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쓴 장정일이 있다.

1990년대 편집

1990년대에는 권위주의의 청산에 따른 시대적 배경의 변화가 시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1990년대의 시의 지배적 유파는 다섯 갈래로 나뉜다.[6]

먼저, 서정시 경향이다. 여기서 말하는 서정시는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유형의 서정단시가 아니라, 관습적인 서정시의 틀을 지향하고 서정성을 강조하는 유형의 서정단시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더니즘이나 민중시, 생태주의 시, 여성주의 시들 또한 서정시 계열에 포함될 수 있으나, 구체적인 특성에서의 차이로 인해 분류된다. 서정춘, 손택수, 박형준, 박현수 등의 시인이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로 아방가르드 및 포스트 모더니즘의 경향이다. 이전의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은 전혀 다른 사조였는데, 1990년대에 이르면서 모더니즘은 문학사 속으로 사라지고, 아방가르드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흡수된다. 당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과격한 실험을 통해 무의미한 세계를 지향한 갈래로, 해당 시인으로는 김요일, 김백겸, 황병승 등이 속한다. 두 번째는 나름의 의미만큼은 지키려고 한 갈래로, 해당 시인으로는 함민복, 김경주, 김선우 등이 속한다.

세 번째로 민중시 경향이다. 1990년대는 권위주의의 청산으로 민중시가 많이 창작되거나 옹호되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몇몇의 젊은 시인들은 민중시를 창작하였는데, 이는 몇 가지 특징을 드러냈다. 먼저, 더 이상 사회주의의 이념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고, 자신이 자생적 공생주자임을 선언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반독재 민주항쟁이라는 깃발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민중시의 주된 관심이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노사갈등과 관련한 문제 등으로 그 시선을 돌렸다. 해당 시인으로는 송경동, 맹문재, 조기조 등이 있다.

네 번째로 생태시 경향이다. 생태시인이란 일반 시인들 중 특별이 생태에 관해 관심을 가진 몇몇의 시인들을 가르키는 말로, 이형기, 오세영, 김지하 등의 시인이 있다.

마지막으로 여성주의 시들이 창작되는 경향을 보였다. 여성주의 시들 또한 생태시와 마찬가지로 여성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 몇몇의 시인들에 의해 향유되었다. 해당 시인으로는 김승희, 강은교, 나희덕 등이 있다.

2000년대 편집

2000년대에는 미래파 시인 등이 등장하며 현대시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각주 편집

  1. 오하근, 〈시 작품 해석의 오류〉 참고.
  2. 정한모, 〈한국 현대시 개관〉 참고.
  3. 모더니즘 문학을 설명할 때 영화적 요소가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전통적인 시간관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 문혜원, 《한국 현대시와 모더니즘》, 신구문학사, 1996년 참고.
  4. 김혜니, 《한국 현대시문학사연구》, 국학자료원, 2002년 참고.
  5. 본래 국민시란 국민 문학의 정신을 시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시문학사의 흐름에서 소위 국민시라는 것은 1940년대의 일제 어용시를 일걷는다. - 김혜니, 《한국 현대시문학사연구》, 국학자료원, 2002년 참고.
  6. 조동일 외 6명, 《한국문학강의》, 길벗, 2015년 참고.

참고문헌 편집

  • 조동일 외 6명, 《한국문학강의》, 길벗, 2015년.
  • 김혜니, 《한국 현대시문학사연구》, 국학자료원, 2002년.
  • 문혜원, 《한국 현대시와 모더니즘》, 신구문학사, 1996년.
  • 정한모, 〈한국 현대시 개관〉.
  • 오하근, 〈시 작품 해석의 오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