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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형
朴東亨
박동형의 초상 (보물 제1927호)
박동형의 초상
(보물 제1927호)
분무공신(奮武功臣)
이름
수부(秀夫)
만촌(巒村) 또는 소와당(笑臥堂)
신상정보
출생일 1695년 7월 3일 (음력)
사망일 1739년 2월 13일 (음력) (향년 43세)

박동형 편집

박동형(朴東亨, 1695년 7월 3일 ~ 1739년 2월 13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공신이다.

생애 편집

박동형은 1695년생으로, 박세량(1657-1724)과 부인 개성 차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현령, 찰방, 병조•예조정랑 등 벼슬들을 지내고 병과에 합격한[1] 큰아버지 박세화(1652-1700)에게 입양되었다. 1728년에 이인좌의 난이 실패한 후, 반란자인 박필현(朴弼顯)과 그의 아들 박사제(朴師濟)가 상주에서 숨고 있었다가 그때 파총(把摠)이였던 박동형이 찾아내었다.[2]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功)을 세우니 영조가 그를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으로 삼고 충원군(忠原君)으로 봉하였다.[3][4]

공신으로 책훈된 후 생애 편집

분무공신 3등으로 책훈(冊勳)된 후 광양현감(光陽縣監), 가선대부(嘉善大夫)[4]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오위장(五衛將)[5], 충무위 대호군(忠武衛 大護軍)으로 임명되었다. 광양현감을 지낼때, 1733년에는 그가 분무공신 2등인 한원군으로 봉해진 낙안군수(樂安郡守) 이만유(李萬囿)와 함께 전세(田稅)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체포되었다. 하지만 공신들이라는 이유로 그 당시 영의정이였던 심수현(沈壽賢)은 그들의 죄를 경감(輕減) 해야된다고 주장하여 장형(杖刑)을 면하였다.[6]

그의 공으로 인하여 양아버지 박세화는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 증직하여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지의금부춘추관사(知義禁府春秋館事, 의금부, 춘추관의 지사)와 오위 도총부 도총관(五衛 都摠府 都摠管)으로 증직되고 덕은군(德恩君)으로 봉작되고[7] 증조할아버지 박거(朴㩮)까지 추증되었다.

박동형은 공신이 되고 봉작된 후에도 서울으로 부터 멀고 먼 시골인 상주에서 살아서 생계와 조정과의 협동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조정이 분무공신들을 녹훈한 후, 박동형을 가자(加資)하고, 녹봉(祿俸) 지급, 등이 어려웠다. 4월 29일, 분무공신들을 책훈한 3일 후에는 이비(吏批)가 우의정 이태좌(李台佐)영조에게 그와 분무공신 2등인 언성군(彦城君) 김중만(金重萬)을

1739년에 사망한 후 공조판서(工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과 오위 도총관(五衛 都摠管)으로 증직되었다.

가족 관계 편집

  • 조부 : 박문창()
    • 아버지 : 박세량()
    • 양아버지 : 박세화(),
  • 외조부 : 차유진()[8], 흥해군수(興海郡守) 손지(孫志)[9][10]
    • 어머니 : 공인 개성 차씨(恭人 開城 車氏)
    • 양어머니 : 증 정부인 구례 손씨(贈 貞夫人 求禮 孫氏)
      • 장인 : 노이공(盧以恭), 현령
        • 처 : 정부인 경주 노씨(貞夫人 慶州 盧氏)
          • 장남 : 박완신(, 1061(문종 15) - 1125(인종 3)), 대악서승
            • 손자 : (, 생몰년 미상), 전중소감
            • 손자 : ( 생몰년 미상), 상의봉어
          • 사위 : 이희제(李羲濟, 1708(선종 1)년생, 몰년 미상)에게 출가. 덕양군의 8세손.
          • 사위 : 여동임(呂東霖, 생몰년 미상)
          • 사위 : 신광일(申光一, 생몰년 미상)
          • 사위 : 김복노(金復魯, 생몰년 미상)
          • 사위 : 신정권(申正權, 생몰년 미상)
          • 사위 : 김준(金儁, 생몰년 미상)

Notes 편집

  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세화(朴世華) 인물 정보]”. 2024년 6월 4일에 확인함. 
  2. 영조실록16권, 영조 4년 3월 26일 병자 13번째 기사
    경상도 상주진(尙州鎭)에서 망명(亡命)한 적 박필현(朴弼顯)을 잡아 참하였다. 박필현이 그의 아들 박사제(朴師濟)와 함께 망명하여 상주의 촌가(村家)에 숨었는데, 파총(把摠) 박동형(朴東亨) 이 그 부자의 관(冠)에 입식(笠飾)한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는 의심하여 이를 영장(營將) 한날(韓㻋)에게 고하였고, 한날이 장교를 내어 붙잡은 것이다.
  3. 영조실록16권, 영조 4년 4월 26일 병오 2번째 기사
    훈호(勳號)를 수충 갈성 결기 효력 분무 공신(輸忠竭誠決幾効力奮武功臣)이라고 정하였다. 오명항(吳命恒)을 1등으로 삼고,

    (중략)

    박동형(朴東亨)을 3등으로 삼았다.
  4. 영조실록16권, 영조 4년 4월 29일 기유 13번째 기사
    분무 일등 공신(奮武一等功臣) 오명항(吳命恒)을 봉하여 해은 부원군(海恩府院君)으로 삼고,

    (중략)

    박동형(朴東亨)은 충원군(忠原君)으로,

    (중략)

    모두 가선 대부로 뛰어 승급시켰다.
  5. 영조가 박동형에게 내린 고신, 옹정 6년 (1728) 4월 26일
    朴東亨爲輸忠竭誠奮武功臣者
    박동형을 수충갈성분무공신으로 삼는다.
  6. 영조실록36권, 영조 9년 10월 28일 병자 2번째기사
    대신(大臣)이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거느리고 구대(求對)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중략)
    "낙안 군수(樂安郡守) 이만유(李萬囿)와 광양 현감(光陽縣監) 박동형(朴東亨)은 모두 전세(田稅)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여 나치(拏致)되었습니다. 법은 결장(決杖)해야 마땅한데, 비록 미천하다고 하지만 이들은 친공신(親功臣)이니, 의공(議功)의 도리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중략)
    "이제부터 친공신은 장형(杖刑)을 면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후략)
  7. 영조가 내린 고신, 옹정 6년 (1728) 9월 14일
    贈 純忠補祚功臣 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副摠管 德恩君 朴世華 贈 純忠補祚功臣 資憲大夫 禮曹判書 兼 知義禁府春秋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德恩君
    순충보조공신,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과 덕은군으로 증직된 박세화를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의금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과 덕은군으로 세롭게 증직하다.
  8. 생부 박세량의 아내, 개성 차씨의 아버지
  9. 양부 박세화의 계처(繼妻), 증 정부인 구례 손씨의 아버지
  10. 손지는 특이한 케이스가 있다. 1687년에 화순현감을 지내면서, 죄인들을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막룡(李莫龍)이라는 자가 도망하려다가 손지의 종에게 잡혀서 채찍을 맞았는데, 학질(말라리아)를 걸려 죽었다. 1700년에는 이막룡의 아들들 이명(李命)과 이가음이(李加音伊)는 손지를 상주에서 살인하였다. 관련된 실록 기사: 《숙종실록숙종 27년 3월 13일 경자 1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