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Naramoksu/봉암사 결사

봉암사 결사는 1947년 가을 성철, 청담, 자운 스님 등이 부처님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시작한 결사이며, 한국 불교 수행 전통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1]

배경 편집

결사의 시작 편집

1947년 가을 성철, 청담, 자운스님 등이 총림생활에는 도서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당시 김법룡 거사가 소장하던 도서를 봉암사로 인수하면서 시작된 봉암사 결사. 이렇게 시작된 결사는 불법에 어긋난다며 우선 불공과 천도재를 받지 않고 수좌스님 스스로 자발적인 노동을 통해서 생활하자는 방침을 정했다.

봉암사 대중 편집

1948년에 봉암사 대중은 30여명이다.

청담, 성철, 자운 스님을 축으로 향곡, 혜암, 월산, 성수, 법전, 우봉, 도우, 보경, 보안, 응산, 청안, 혜명, 일도, 보문, 홍경, 종수 스님 등

결사의 내용 편집

공주규약(共住規約) 편집

당시 봉암사 수좌스님들은 나무하고 물긷고 밭갈고 탁발하는 것을 일상화했다. 가사와 장삼, 발우 등의 개선도 시도했다. 이같은 제반규칙을 일컫는 ‘공주규약’에는 이외에도 참선수행, 포살 실시, 능엄주 암송, 자주ㆍ자치 구현, 청규와 계율의 준수 등 17개 항에 달하는 규약이 포함돼 있다.

  • 삼엄한 부처님 계법과 숭고한 조사들의 가르침을 근수역행(勤修力行)하여 구경성불의 원만한 속성(速成)을 기약함.
  • 여하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불조의 교칙(敎則) 이외의 각자 사견(私見)은 절대 배제함.
  • 일상에 수용하는 것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나무 하고 밭 갈고 탁발(托鉢)하는 등, 어떠한 고역도 불사함.
  • 소작인들의 세조(稅租)와 신도들의 특별 보시에 의한 생계는 단연 청산함.
  • 신도들의 불전 공양은 각기 가져온 물건을 올리고, 지성 예배 드리는 것으로 그치게 함.
  • 변소에 가거나 울력(運役)하고 잠 자는 때를 제하고는 항상 오조가사와 장삼을 착용토록 함.
  • 외출할 때는 삿갓을 쓰고 석장(錫杖)을 짚고,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이 다닐 것. 가사는 비단 종류를 피하고, 이것을 괴색(壞色)해야 함.
  • 발우는 목발(木鉢)을 피하고 철발(鐵鉢)이나 와발(瓦鉢)을 사용해야 함.
  • 하루 한 차례 능엄주(楞嚴呪)를 일과로 지송토록 함.
  • 매일 2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도록 할 것.
  • 보름마다 계본(戒本)을 가지고 포살(布薩)을 시행토록 할 것.
  • 불전에 공양을 오후에는 올리지 않으며 아침 공양을 죽으로 정함.
  • 앉는 차서는 계납(戒臘)에 의해서 자리를 정함.
  • 선방 내에서는 언제나 면벽관심(面壁觀心)하고 잡담하기를 엄금함.
  •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눕거나 잠자는 일을 허락하지 아니함.
  • 필요한 물건들을 각자가 마련해서 쓰도록 할 것.
  • 이밖에 다른 규칙을 청규(淸規)나 대소승의 율법에 준하도록 함. 이상.

우기(右記) 조장(條章)의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거부하는 자는 연단공주(連單共住)를 부득(不得)함.[2]

결사의 내용 편집

이같은 개혁을 시도한 것은 당시 불조교법이 파괴됐다는 현실 인식에서 나왔다. 봉암사 결사에 대한 소문이 점차적으로 퍼져감에 따라 전국 각처의 수좌스님들은 봉암사에서 수행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몰려들었다.

결사는 재가불자에게도 급속히 번졌다. 봉암사에 밀려든 불자들을 대상으로 보살계 법회를 봉행했고, 이를 기반으로 스님-신도간 위계질서가 구축됐다. 재가자가 스님들에게 예를 표하는 삼배의례도 이 당시부터 정착됐다. 법회에서 법단 내 중단예불이 폐지됐고 〈반야심경〉 독송의례가 보편화됐다. 이는 봉암사 결사가 불교의 대중화에도 큰 획을 긋게 된 배경이다. 보살계 법회 뿐 아니라 공양물의 평등성 등도 단적인 예다.

이처럼 결사는 불교의 근본과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기 위한 현실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가운데,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잡고 사상적 대안을 정립해 주었다.

결사의 종료 편집

봉암사 결사는 2년여가 지난 1949년부터 봉암사 인근에 빨치산이 출몰하면서 사찰 인근에 경찰이 자주 출입했고 급기야 수행생활에 지장은 물론 수좌스님들의 생명에 위협까지 받게되어 1949년 9월 봉암사에 보관됐던 도서는 부산의 묘관음사로 이전됐고 대중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결사가 종료됨.

결사의 의의 편집

  • 일제 식민지 불교 잔재의 극복
    • 일본불교의 청산, 식민지 예속성의 단절, 한국 전통불교의 복원을 충실히 실천했다.
  • 근본불교적인 불교 개혁운동을 표방한 결사는 불교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가 됐다.
  • 1954년부터 본격화된 불교정화 운동 추진의 정신적 기반이 됨에 따라 봉암사 결사에 동참한 대다수의 수좌스님들은 정화운동을 주도하거나 합류했다. 물론 결사의 정신이 정화운동을 추진한 중심부에 있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결사의 정신이 조계종단 재건과 운용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다. 잘 알려진대로 결사에서 실행됐던 의식와 의례 규칙 등은 이후 관행화됐다. 앞서 제시한 장삼과 가사, 〈반야심경〉 독송, 삼배의례 등의 보편화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결사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규약과 이념, 실천 등은 조계종 승가정신사의 상징사적 의미를 제시해준다.

식민지 불교의 극복, 근본불교적인 개혁운동, 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 결사에서 시도된 의례의 지속성 등은 봉암사 결사가 한국불교에 남긴 상당히 의미있는 획으로 인식되고 있다. 김광식 부천대 교수는 ‘봉암사 결사의 전개와 성격’을 주제로 한 논문에서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사의 기념비적인 의의를 갖고 있다”며 “근대 식민지불교의 모순을 청산하려는 강렬한 정신과 실천에서 대두된 봉암사 결사는 이후 불교정화운동의 추진 및 조계종단 재건과 운영에 있어 기본적 준칙으로 인식되었다고 할 만하다”고 밝혔다.

참고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