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화궁(順和宮)은 한성 중부, 현재의 인사동 194자리에 있었던 궁이다. 조선 중종이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 주었기에 순화궁이라 불렸다.[1] 이후 요릿집인 태화관이 되었는데 3·1독립선언서가 여기서 낭독되었다.

1920년대 태화여자관 시절 순화궁

역사 편집

헌종 때에는 경빈 김씨의 사저가 되었다.[2][3]

1896년에 이르러 조선 국왕 고종은 대한제국으로의 칭제건원을 앞두고 수도 한양의 중심점을 나타내는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을 이 주변에 세웠다.[4]

이완용이 1907년 집을 화재로 잃고 일제로부터 순화궁을 받았다. 이완용은 순화궁을 전세로 주어 명월관의 분점인 태화관이 되었는데, 이곳이 3·1운동 때에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이다.[3] 이를 1921년에 감리교선교부가 매입하여 태화여자관이라는 이름의 감리교 포교지 겸 여성 복지 사회재단이 된다. 여기서 1928년 10월 로젠버거(Elma T. Rosenberger)에 의해 대한민국 최초의 우유급식이 시작된다.[5]

노후와 좁은 공간 문제로 태화재단은 1938년에 건물을 다시 짓는다. 이 때 한국식 건축양식을 살린 건물을 신축하여 사용하다가 일제 말에 징발, 해방 후에 경찰서 청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태화기독교사회관으로 운용되었다.[6][7] 태화기독교사회관은 1980년 도시개발계획으로 헐리게 되었고,[8] 그 자리에 태화빌딩이 들어섰다.[1]

각주 편집

  1. 「歷史의숨결」이 사라지고있다 開發에밀려나는「先人들의 발자취」, 《경향신문》, 1982.7.12
  2. 순화궁 터, 문화컨텐츠닷컴, 2013.5.
  3. 仁寺洞 泰和舘, 《동아일보》, 1924.7.5
  4. 奉, 華植 (1995년 6월 14일). “<그때그곳지금은>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 《중앙일보》 (서울 마포: 중앙일보). 2024년 2월 28일에 확인함. 
  5. “태화복지재단은 > 태화의 역사 > 연혁”. 2021년 6월 29일에 확인함. 
  6. 精薄児作品展등 기념행사 50돌…基督泰和舘, 《경향신문》, 1971.5.4
  7. 삼일독립선언유적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관광지식정보시스템
  8. 헐리는 정신文化의 表徴的건물 泰和舘 「都心再開發(도심재개발)」횡포에 보살핌 받지 못해, 《경향신문》, 1980.1.11

같이 보기 편집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