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군 (충청남도)

신창군(新昌郡)은 충청남도의 폐지된 행정 구역으로, 신창면을 중심으로 아산시 서남부의 선장면·도고면 등 3개 면 지역을 관할했던 이다. 이 지역의 본거지인 학성면은 오늘날의 아산시 신창면으로 남아 있다.

1914년 이후 편집

1914년의 행정구역[1]과 현재의 행정구역 비교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구 행정구역 신 행정구역
북면(北面) 초정면 가산리, 대흥리, 채신언리, 홍곳리
대서면(大西面) 군덕리, 궁평리, 선창리, 신동리, 신문리, 죽산리
도고면 신성리, 신언리
남상면(南上面) 금산리, 농은리, 도산리, 봉농리, 신유리, 시전리, 화천리, 효자리
남하면(南下面) 기곡리, 덕암리, 석당리, 신통리, 오암리, 와산리, 향산리
군내면(郡內面) 북동리/남산리/홍문리/금반형리/유기촌/교촌/신대리/(대동면)잉동 일부 학성면 읍내리
대동면(大東面) 득산리, 수장리, 실옥리, 점양리, 창암리, 행목리, 황산리
소동면(小東面) 가내리, 가덕리, 남성리, 신달리
북면 궁화리, 신곡리, 오목리
  • 신창면(新昌面)은 아산군 북면 등을 합해 학성면을 거쳐 1917년 신창면으로 불렀다.
  • 도고면(道高面)은 도고산(해발 483m)에서 유래되었다.
  • 선장면(仙掌面)은 삼대 명당 중 선인앙장지지(仙人仰掌之地)에서 유래되었다.

역사 편집

  • 청동기 시대에 남성리 석관묘와 그곳에서 출토된 세형동검 3점을 비롯한 각종의 청동기, 구슬류, 토기 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검파형 동기, 방패형 동기 등의 특수한 의기는 매우 주목되는 유물로 이 시기에 다수의 사람들이 거주하며 동시에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마한의 염로국의 영역이었다가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행정체제의 정비로 굴직현(屈直縣)이 설치되었다
  • 신라에 점령되어 통일신라시대인 757년 경덕왕 16년 행정체제 개편으로 기량현(祁梁縣)으로 개명하고 웅천주 탕정군(湯井郡)의 영현이 되었다.
  • 고려초의 대대적인 지방행정명칭 변경에 의하여 신창현(新昌縣)이 되었다. 서쪽 장포에 성을 쌓고 당성 이라 부르면서 서울에로의 조운을 위한 조곡의 수집 및 발선처로 삼았다
  • 조선 건국 후 1414년 온수현과 병합하여 온창현이라 하였다가 1416년 다시 나누어 신창현이 되었다.

※신창현의 규모

(가) 1789년 호구총수의 자료를 기준: 1941호, 8122구(口)

(나) 세종지리지 : 토지 3064결(논의 비율 1/2)

(다) 여지도서(18세기 중엽) : 3,075결(간전1782, 수전 1,293)

ㅡ출처: 아산시 신창면 사무소 연혁-

  • 1895년 23부府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홍주부 관할 온양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13도제로 환원되면서 충청남도에 편입되었다.
  •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통폐합으로 온양군과 함께 아산군에 통폐합되었다. 남상면이 도고면(道高面)으로 개명되었다.
  • 1917년 학성면이 신창면으로 개명하고 초정면(椒井面)이 도고면의 신성리를 편입하고 선장면(仙掌面)으로 개명되었다.
  • 1995년 아산군이 온양시와 도농복합시로 재 통합해 지금의 아산시 신창면, 선장면, 도고면이 되었다.

신창을 본관으로 두고 있는 성씨 편집

주요 인물 편집

  • 맹사성-孟思誠은 1360년(공민왕9)~1438년(세종20),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신창.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신구대조) 조선 전도부군면리동 명칭 일람 (1917년)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