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하 (1883년)

양재하(楊在河, 일본식 이름: 靑木在河아오키 사이카, 1883년 6월 20일 ~ 1946년 11월 21일)는 일제강점기의 관료 겸 기업인이다.

양재하
楊在河
출생1883년(고종20) 6월 20일
사망1946년 11월 21일
국적조선(1883년~1897년)
대한제국(1897년~1910년)
일본 제국(1910년~1945년)
학력부산 개성학교 초등과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 임학과
직업관료, 기업가
부모양중계(楊重癸)
자녀5남
장남 양일갑(楊一甲)
양경갑
상훈훈6등 서보장(일본제국, 1934년)
종군기장(일본제국, 1934년)
만주제국황제방문기념장(만주국, 1935년)
훈5등 서보장(일본제국, 1938년)
훈6등 경운장(만주국, 1941년)

생애 편집

1883년 (고종20) 6월 20일 출생했다. 본적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이며, 부친은 양중계(楊重癸)이다.

1899년 부산 개성학교 초등과를 졸업하고 1904년 10월 시종원 분시어(侍從院分侍御)에 임명되었다. 1906년부터 1907년까지 태극학회, 1909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흥학회에서 활동한 엘리트로 1913년 도쿄제국대학 임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이왕직의 촉탁으로 위촉되었고, 계림농림주식회사와 주식회사 대동사 지배인을 지내는 등 기업인으로 일했다.

1921년봉천 주재 일본 총영사관의 부영사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고위 외교관과 관료로 근무했다. 양재하와 김우영일본 제국의 외교관이 된 것은 3·1 운동 이후 펼쳐진 유화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첫 사례였기 때문에 크게 선전되었다. 1945년 광복 시점까지 일본 외무성 소속의 조선인 부영사는 양재하를 포함해 총 6명이 배출되었다.

다음 임지로는 한국인 교포가 많은 미국 하와이주호놀룰루 주재 부영사로 발령받았다. 이 역시 정치적인 목적이 강한 인사였던데다 하와이를 기지로 한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이라 하여, 현지 교포들이 "조선사람으로서 일본영사관에 부영사로 와있는 것은 우리의 수치"라며 축출 운동을 벌였다. 양재하의 운전 기사가 시비에 휘말려 상해를 입은 일도 있었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군수와 도 참여관을 지냈다. 충북 참여관으로 재임 중이던 1937년1938년에 《매일신보》에 시국과 관련된 글을 기고하는 등 시정연설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일본의 식민통치로 조선인이 일등국민이 되었다고 선전하거나, 중일 전쟁 발발로 어수선한 시국 속에 조선인도 일본인에 뒤지지 않도록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양재하는 처음 부영사로 임명되어 관직에 들어선 지 17년 만인 1938년에 고등관 2등에 오르면서 고속 승진을 했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과 만주국 정부으로부터 훈장도 여러 차례 수여받았다. 1936년에 일본이 추진한 조선인의 만주 이주와 관련된 기업인 선만척식주식회사의 창립준비위원을 맡았고, 이후 이 회사와 만선척식주식회사의 감사를 역임하며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슬하에 5남이 있으며, 장남은 양일갑(楊一甲)이다.

약력 편집

훈포장 서훈 내역 편집

  • 1934년 : 훈6등 서보장
  • 1934년 : 종군기장
  • 1935년 : 만주제국황제방문기념장 (만주국)
  • 1938년 : 훈5등 서보장
  • 1941년 : 훈6위 경운장 (만주국)

사후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자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