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테구스(El tegüs, 燕帖古思, ?-1340.8.9.)는 보르지긴(孛兒只斤)씨로 의 황족이다. 원 문종 투그테무르(圖帖睦爾)의 차남이다. 어머니는 부다시리(卜答失里) 황후이다. 원래 이름은 구나다라(古納答剌)이다. 지순(至順) 3년 3월 24일 계사일(癸巳日, 양력 1332년 4월 19일) 구나다라는 엘 테구스로 개명하였다. 원통(元統) 원년(1333), 원 혜종이 즉위하면서 부다시리 황후와 엘 테무르의 계략 하에, 당제 엘 테구스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원래는 형이 있었으나 일찍 사망하면서 황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메르키트 바얀린친발우카가투를 옹립하면서 황제에 오르지는 못했다. 지원(至元) 6년 6월 14일 병신일(丙申日, 양력 1340년 7월 9일), 혜종은 문종의 묘주(廟主)를 철거한다는 조를 내렸고, 태황태후(太皇太后) 부다시리는 동안주(東安州)로 유배되었으며, 태자 엘 테구스는 고려로 유배보냈다. 같은해 7월 16일 정묘일(丁卯日, 양력 1340년 8월 9일), 엘 테구스는 유배길에 활찰아(闊察兒)에게 피살되었다.

엘 테구스

생애 편집

엘 테구스의 본명은 구나다라(古納答剌, Gunadara)라고 하며, 형 아라트나다라(Aratnadara), 동생 타이핑누(太平訥, Taipingnu)가 있었다.

지순(至順) 2년(1331) 정월, 구나다라의 병이 나은 것을 기념으로 킵차크 한국 군벌 수령 엘 테무르와 차기르 공주 등에게 금, 은, 지폐가 주어졌다.[1] 엘 테무르는 천력의 난을 일으킨 투그테무르를 추대한 실력자이며, 이후로 구나다라는 엘 테무르와 깊은 연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2월, 티베트 불교승에 의해 황자 구나다라의 불사(佛事) 1주년을 열었고[2] 이후로 구나다라는 티베트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가끔 불사에 관련되었다.[3][4][5][6] 같은해 9월 아루군살리(阿魯渾薩理)의 고택에 구나다라는 엘 테무르와 함께 살게 되었다.[7]

그리고 형 아라토나다라가 일찍 사망하면서 이어서 구나다라가 자야가투 칸의 후계자 지위로 올랐으며, 지순 3년(1332) 구나다라는 이름을 엘 테구스로 고쳤다.[8]

카안 자리를 둘러싼 싸움 편집

같은 해 9월, 병상이 악화된 자야가투 카안(Jaya'atu Qa'an), 즉 원 문종(元文宗)은 엘 테구스와 엘 테무르 등을 모으고, 상도(上都) 인근 옹구차트(王忽察都)에서 자신이 즉위하기 위하여 형 코실라(Qošila) 즉 원 명종(元明宗)을 독살한 사건 한 건을 후회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사후에는 코실라의 장남 토곤 테무르(Toγon Temür)를 후계자로 맞이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곧 숨졌다. 그러나 자야가투 카안을 사실상 괴뢰로 만든 엘 테무르는 코실라 암살 수모자였기 때문에, 토곤 테무르에 보복당할 것을 우려하여 유언을 무시하고 엘 테구스를 즉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자야가투 카안의 과부 부다시리 카툰(Budashiri Qatun)과 메르키트 바얀(Merkid Bayan)은 자야가투 카안의 유언을 방패로 엘 테구스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쌍방의 타협안으로서 토곤 테무르의 아우이며 아직 어린 아이인 린친발(Rinčinbal)을 옹립하였으니, 이가 바로 원 영종(元寧宗)이다.[9] 그러나 린친발도 즉위 후 몇 개월 만에 사망하였고, 카안 자리를 둘러싼 싸움이 재현되었다.

이전처럼 엘 테무르는 엘 테구스를, 부다시리와 바얀은 토곤 테무르를 각각 즉위시키려 하였고 양보 없이 카안 자리는 좀처럼 결정되지 않았다. 결국 바얀 등에 있어서는 때맞춰 엘 테무르가 급사하였기 때문에, 후원자를 잃은 엘 테구스는 패배하고 토곤 테무르가 우카가투 카안(Uqaγatu Qa'an)으로 즉위하게 되었으니 이가 바로 원 혜종(元惠宗)이다. 한편 『원사(元史)』에 의하면, 이때 '무종(武宗)과 인종(仁宗) 때와 같이 토곤 테무르 후는 엘 테구스에게 자리가 양보된다'라고 약속이 이뤄졌다고 한다.[10]

만년 편집

긴 정쟁 끝에 즉위한 토곤 테무르이지만, 정사의 실험은 완전히 바얀에게 장악되었으며, 바얀의 괴뢰에 불과했다. 후에 지원(至元) 4년(1338), '바얀과 황후 부다시리가 토곤 테무르를 폐하고 엘 테구스를 옹립하려 하고 있다'는 뜻을 바얀의 조카 톡토(脫脫)가 고발하였고,[11] 바얀과 토곤 테무르의 관계는 결국 악화되었다.

지원 6년(1340) 2월, 우카가투 카안이 바얀에 의한 출전(出田) 요청을 거절한 바, 바얀은 엘 테구스를 동행하여 유림(柳林)으로 갔다.[12] 이것이 바얀에 의한 우카가투 카안 폐위의 움직임으로 본 톡토 등은 우카가투 카안과 상담한 후에, 선수를 쳐서 바얀을 포박하였고, 끝내 바얀을 실각시키는데 성공하였다.[13] 우카가투 카안은 바얀을 실각시킨 때에 '바얀이 자신과 부다시리, 엘 테구스 등을 경시하였다'는 것을 죄상으로 들면서[14] 4개월 후에는 '부다시리, 엘 테구스 등이 코실라 암살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죄상으로 두 명을 추방할 것을 결정하였다.[15]

엘 테구스는 고려(高麗)로 추방되었으나,[16] 고려에 도착하는 도중에 오치체르라는 인물에게 암살되었다.[17][18] 『원사(元史)』권107 「종실세계표(宗室世系表)」에는 형 아라토나다라, 엘 테구스, 동생 타이핑누 등에게는 모두 자손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19] 툭 테무르 가계는 이렇게 단절되었다고 되어 있다. 한편, 『원사』에는 지정(至正) 5년(1345) 11월에 진망숙(陳望叔)이라는 인물이 엘 테구스의 이름을 사칭한 죄로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0][21]

회왕 툭 테무르 가문 편집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元史』卷35 「文宗本紀4」, "至順二年春正月癸卯, 以皇子古納答剌疹疾愈, 賜燕鐵木兒及公主察吉兒各金百兩・銀五百兩・鈔二千錠, 撒敦等金・銀・鈔各有差."
  2. 『元史』卷35 「文宗本紀4」, "至順二年二月己未, 命西僧爲皇子古納答剌作佛事一周歳."
  3. 『元史』卷35 「文宗本紀4」, "至順二年夏四月丙午朔, 命西僧於五台及霧霊山作佛事各一月, 爲皇太子古納答剌祈福."
  4. 『元史』卷35 「文宗本紀4」, "至順二年二年冬十月己酉, 時享於太廟. 爲皇子古納答剌作佛事, 釋在京囚, 死罪者二人, 杖罪者四十七人."
  5. 『元史』卷36 「文宗本紀5」, "至順二年三年春正月戊戌, 命中書省以鈔三千錠・幣帛各三千匹, 給皇子古納答剌歳例鷹犬回賜."
  6. 『元史』卷37 「寧宗本紀」, "至順三年十月甲子……皇弟燕帖古思受戒於西僧加兒麻哇」
  7. 『元史』卷35 「文宗本紀4」, "至順二年九月癸酉朔, 市阿魯渾撒里宅, 命燕鐵木兒奉皇子古納答剌居之."
  8. 『元史』卷36 「文宗本紀5」, "至順三年三月癸巳, 皇子古納答剌更名燕帖古思."
  9. 『元史』卷38 「順帝本紀1」, "至順三年八月己酉, 文宗崩, 燕鐵木兒請文宗後立太子燕帖古思, 後不從, 而命立明宗次子懿璘質班, 是爲寧宗."
  10. 『元史』卷38 「順帝本紀1」, "至順三年十一月壬辰, 寧宗崩, 燕鐵木兒復請立燕帖古思, 文宗後曰, 吾子尙幼, 妥懽帖睦爾在廣西, 今年十三矣, 且明宗之長子, 禮當立之. 乃命中書左丞闊里吉思迎帝於靜江. … 俄而燕鐵木兒死, 後乃與大臣定議立帝, 且曰萬歳之後, 其傳位於燕帖古思, 若武宗・仁宗故事. 諸王宗戚奉上璽綬勸進."
  11. 『庚申外史』卷上, "戊寅, 至元四年 … 伯顔與太皇太后謀立燕帖古思而廢帝, 其侄脫脫頗聞其謀, 竊以告其師吳直方行可, 敎之以密告于帝, 令帝知而預爲防."
  12. 六年二月, 伯顔自領兵衛, 請帝出田. 脫脫告帝托疾不往. 伯顔固請太子燕帖古思出次柳林. 脫脫欲有所爲, 遂與世傑班・阿魯合議, 白於帝.
  13. 六年二月, 伯顔請太子燕帖古思獵於柳林. 脫脫與世傑班・阿魯合謀以所掌兵及宿衛士拒伯顔.
  14. 『元史』卷40 「順帝本紀3」, "至元六年三年二月己亥, 黜中書大丞相伯顔爲河南行省左丞相, 詔曰, 朕踐位以來, 命伯顔爲太師・秦王・中書大丞相, 而伯顔不能安分, 專權自恣, 欺朕年幼, 輕視太皇太后及朕弟燕帖古思, 變亂祖宗成憲, 虐害天下. 加以極刑, 允合輿論. 朕念先朝之故, 尙存憫恤, 今命伯顔出爲河南行省左丞相. 所有元領諸衛親軍並怯薛丹人等, 詔書到時, 卽許散還. …"
  15. 『元史』卷40 「順帝本紀3」, "至元六年六月丙申, 詔撤文宗廟主, 徙太皇太后不答失里東安州安置, 放太子燕帖古思於高麗, 其略曰 … 燕帖古思昔雖幼沖, 理難同處, 朕終不陷於覆轍, 專務殘酷, 惟放諸高麗, 當時賊臣月魯不花・也里牙已死, 其以明里董阿等明正典刑. 監察御史崔敬言燕帖古思不宜放逐, 不報."
  16. 『元史』卷184 「列傳71」崔敬傳, "崔敬, 字伯恭, 大寧之惠州人 … 至元六年, 遷樞密院都事, 拜監察御史. 時旣毁文宗廟主, 削文宗後皇太后之號, 徙東安州, 而皇弟燕帖古思, 文宗子也, 又放之高麗. 敬上疏, 略曰, …. 不報."
  17. 『元史』卷36 「文宗本紀5」, "放燕帖古思於高麗, 未至, 月闊察兒害之於中道."
  18. 『元史』卷40 「順帝本紀3」, "至元六年秋七月丁卯, 燕帖古思薨, 詔以鈔一百錠備物祭之."
  19. 『元史』 卷107 「表2宗室世系表」, "文宗皇帝, 三子長皇太子阿剌忒納答剌, 早薨, 無後. 次二燕帖古思太子, 次三太平訥太子, 倶早隕, 無後."
  20. 『元史』卷41 「順帝本紀4」, "至正五年十一月甲午 … 奉元路陳望叔僞稱燕帖古思太子, 伏誅."
  21. 『元史』 卷138 「列傳25」 伯顔傳, "四年, 文宗大漸, 遺詔立兄明宗之子. 已而文宗崩, 明宗次子懿璘質班卽位, 四十三日而崩. 文宗後臨朝. 燕鐵木兒與群臣議立文宗子燕帖古思. 文宗後曰, 天位至重, 吾兒年方幼沖, 豈能任耶. 明宗有子妥懽帖睦爾, 出居廣西, 今年十三矣, 可嗣大統. 於是奉太后命, 召還京師, 至良鄕, 具鹵簿迎之. 燕鐵木兒與之並馬而行, 於馬上擧鞭指畵, 告以國家多難遣使奉迎之故. 而妥懽帖睦爾卒無一語酬之. 燕鐵木兒疑其意不可測, 且明宗之崩, 實與逆謀, 恐其卽位之後追擧前事, 故宿留數月, 而心志日以瞀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