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향교(義城鄕校)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 있는 조선시대의 향교이다. 1982년 2월 24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의성향교
(義城鄕校)
대한민국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종목유형문화재 제150호
(1982년 2월 24일 지정)
수량5동
시대조선시대
위치
의성향교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의성향교
의성향교
의성향교(대한민국)
주소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808번지
좌표북위 36° 20′ 55.1″ 동경 128° 41′ 59.4″ / 북위 36.348639° 동경 128.699833°  / 36.348639; 128.699833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개요 편집

의성의 향교는 의성읍 도동동 동산(東山) 위에, 오토산(五土山)과 금성산(金城山)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의성현지》(義城縣誌)에 따르면 의성이 문소군이라 불리게 된 시기 초에 현 동쪽 1리 되는 곳에 공자묘(孔子廟)가 있었다고 하여, 당시에는 공자를 비롯한 5성을 제향(祭享)하는 문묘(文廟)의 구실만 한 듯하고 그 위치는 중리동 아사천(衙舍川) 인근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1] 의성의 공자묘는 고려 초 이후 향교의 역할까지 겸했으나 점점 쇠퇴해졌다.

조선 초기에 퇴락한 건물을 다시 지었다. 명 홍치(弘治, 1488-1505) 연간인 성종 때에 의성현령 이종준(李宗準)이 동산으로 이전하였으며,[2] 인종 1년(1545)에 한 차례 증축, 중수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선조 35년(1602년)에 현령 허민중(許旻重)이 복원하였으며 이 시기에 동서무를 건립하였다. 이듬해인 선조 36년(1603년) 대성전 내 위판(位版) 일부가 없어져 당시 경상감사 이시발이 사건을 조사하였다.[3] 당시 의성향교의 대성전에 모셔져 있던 위판 가운데 대성(공자)의 위판과 술성공, 예국공, 낙국공의 위판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복성공, 종성공, 아성공의 위판은 상 아래에 거꾸로 놓여 있거나 문 밖에 던져져 있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상 아래에 거꾸로 놓인 것은 특별히 더러워지거나 손상되지 않은 것은 그대로 봉안하고, 없어진 것과 부판이 문 밖에 던져진 것은 모두 새로 위판을 제작하게 하였으며(도국공 위판은 대성전 뒤에 매안되었다) 새로운 위판이 완성된 뒤에 각 위에 대한 위안제를 한꺼번에 설행하게 하였다.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안동부에 수감된 김건상은 경차관을 보내 정상을 조사한 뒤 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다.[4] 한편 의성현령 장현광은 "성품이 본래 오활하여 관의 업무를 다스리지 못하는 바람에 휘하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서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고 있고, 이로써 영남의 고을 하나가 나날이 조폐해지고 있으니 파직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에 의해 파직, 사흘 뒤 심관이 신임 의성현령이 되었다.

현종 11년(1670년)에 현령 이당규(李堂揆)가 향교를 확장하였고, 숙종 7년(1681년)에 대성전을 보수하였다.[5]

영조 21년(1745년)에 대성전과 명륜당이 중건되었으며, 38년(1762년)에 대성전[6]과 광풍루가 중수되었다.[7] 순조 5년(1805년)에는 향교에 딸린 전답을 더 사들이기도 하였다.

철종 2년(1851년) 대성전에 빗물이 새어 연목과 기와를 교체하였다.[8]

고종 8년(1871년)에는 대성전, 명륜당, 광풍루의 서까래와 기와를 교체하고, 단청을 입혔다.[9] 고종 26년(1889)에 대성전을 중수하였으며,[10] 고종 27년(1890)에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대성전을 확장 중건하였다.[11]

1910년에는 광풍루를 중수하였으며, 1921년에 명륜당을 중건하면서 대성전, 대성전 정문, 서협문, 공수고(供需庫), 서재 등을 보수하고 광풍루에 난간을 덧붙였다.[12] 일제시대에는 전반적으로 향교 기능이 위축된 상태였으나 유림의 노력으로 1930년에는 위토(位土)를 정비하고 향교의 대성전과 명륜당, 광풍루, 담장 및 상탁(床卓)을 개수하였다.[13]

해방 뒤 1950년 6.25 전쟁으로 위판이 소실되었다가 1954년에 복향(復享)하였다. 1968년에 향교 일곽을 보수하였으며,[14] 1971년에 광풍루를 중수하고,[15]

1980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16] 1982년에는 명륜당과 광풍루를 보수하였고,[17]

1991년에 서재를 신축하였으며 일곽을 보수하였다. 이후 1992년1993년, 1994년, 1997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참고 자료 편집

각주 편집

  1. 의성향교
  2. 문소향교성전중수기(聞韶鄕校聖殿重修記), 成均館, 『校宮大觀』, 成均館, 2003 ; pp.898-902
  3.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36년 12월 9일 경인
  4. 《선조실록》선조 36년 12월 14일 을미
  5. 대성전 암막새에 남아 있는 명문에는 조선 숙종 7년에 해당하는 강희(康熙) 20년 신유(辛酉)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시기의 기록은 현재 찾을 수 없으며, 보수의 범위 또한 정확히 알 길 없으나 최소한 산자 이상 해체 보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성전중수기'(聖殿重修記), 成均館, 『校宮大觀』, 成均館, 2003 ; pp.909-911
  7. '항교성전중수여포우변통기'(鄕校聖殿重修與脯牛變通記). 기문 말미에 '上之十二年丁未十二月'로 되어 있으나 맞는 해가 없으며 다만, 영조 11년(1787년) 혹은 헌종 13년(1847년)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成均館, 위의 책, pp.907-909).
  8. '성전중수기' 기문 말미에 '丙辰嘉平下澣'이라 되어 있어 1856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成均館, 위의 책, pp.916-918).
  9.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기문 서두에 '聖上八年辛未', 기문 말미에 '龍集甲戌二月上澣'이라 되어 있어 1874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成均館, 위의 책, pp.918-920).
  10. '성전중수기'에 '金上二十六年己丑'으로 되어 있고, 기문 말미에 '歲己丑重陽月'이라 되어 있어, 1889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成均館, 위의 책, pp.923-925).
  11. '문소향교성전중수기' 말미에 '康熙庚戌後二百二十一年庚寅具月上澣'이라 되어 있어 1890년에 작성된 기문임을 알 수 있다(成均館, 위의 책, pp.898-902).
  12. '명륜당중건기'(明倫堂重建記). 기문 중간에 중건 및 보수 기록을 언급하면서 '신유'(辛酉)라 하였고, 기문 말미에 '孔夫子誕降二千四百七十三年壬戌仲春'이라 되어 있어 1921년에 중건하고, 기문은 다음 해인 1922년에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成均館, 위의 책, pp.930-933).
  13. '문묘중수기'(文廟重修記). 말미에 '孔夫子誕降後二千四百八十一年 庚午'라 되어 있어 1930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成均館, 위의 책, pp.933-934).
  14. 의성향교중수기(義城鄕校重修記). 기문 말미에 '孔夫子誕生二千五百十九年戊申仲秋日'이라 되어 있어 1968년에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成均館, 위의 책, pp.936-938)
  15. 의성향교광풍루중수기(義城鄕校光風樓重修記). 기문 말미에‘隆熙庚戌後再辛亥三月己巳’라 되어 있어 1971년에 기문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 '대성전중수기'(大成殿重修記). 중수기간은 무오(戊午) 봄부터 기미(己未) 가을까지로 1978년에서 1979년 사이에 중수되었고, 기문 말미에 '檀紀四千三百十三年庚申三月下澣'이라 되어 있어 기문은 1980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成均館, 『校宮大觀』, 成均館, 2003 ; pp.940-941)
  17. 의성향교중수기. 기문 말미에 '孔子紀元二千五百三十三年壬戌八月'이라 되어 있어 1982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成均館, 위의 책, pp.942-943)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