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李善: 생몰년 미상)은 후한 초기의 관료로, 차손(次孫)이며, 남양군 육양현(淯陽縣) 사람이다.[1]

생애 편집

본래 같은 현 사람 이원(李元)의 노복(《후한서》 원문에는 '창두(蒼頭)')이었다. 건무 연간에 역병이 돌아 이원을 포함한 이씨 집안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나갔고, 이원의 아들 이속(李續)은 태어난 지 수십 일만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한편 이원의 집안은 재산이 천만 전이나 되었기 때문에, 집안의 노비들은 함께 짜고 이속을 죽여 재산을 나눠가지기로 했다. 이선은 이씨 집안에서 그들을 제지할 힘이 없다고 생각하여, 몰래 이속을 업고 달아나 산양군 하구현(瑕丘縣)의 경계 쪽에서 숨어 살며 이속을 친자식처럼 길렀다. 갓난아이인 이속을 웃어른을 모시듯 보살폈고, 길을 갈 때에는 항상 뒤따라 갔다. 고을에서는 이선의 행실을 가상히 여겼다.[2]

이속이 열 살이 되자, 이선은 이속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이속에게 가업을 잇도록 했다. 예전의 노비들은 모두 이선의 고발로 주살되었다. 하구(瑕丘令) 종리의는 이선의 행실을 칭찬하는 글을 조정에 올렸고, 광무제는 이선과 이속을 태자사인에 임명했다.[3]

명제 때 이선은 공부(公府)에 벽소되었고, 일처리가 뛰어나 일남태수로 영전했다. 임지로 부임하던 길에 육양으로 가던 중에 이원의 무덤을 지나가게 되자 미리 1리 앞에서 조복을 벗고, 무덤에 이르자 호미를 들고 벌초하고는 절을 하며 매우 애통하게 곡했다. 몸소 불을 때어 밥을 지어 제사를 올렸고, 울면서 "군부인, 이선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며칠을 슬퍼하다가 길을 떠났다.[4]

임지에 도착한 이선은 선정을 베풀어 이민족들이 그를 따랐고, 이선은 다시 구강태수로 전임되었으나 부임하던 길에 병들어 죽었다. 이속은 하간에 이르렀다.[5]

전기 자료 편집

각주 편집

  1. 《후한서》 권81, 〈열전〉71, 이선, "李善字次孫,南陽淯陽人"
  2. 같은 권, "本同縣李元蒼頭也。建武中疫疾,元家相繼死沒,唯孤兒續始生數旬,而貲財千萬,諸奴婢私共計議,欲謀殺續,分其財產。善深傷李氏而力不能制,乃潛負續逃去,隱山陽瑕丘界中,親自哺養,乳為生湩,推燥居溼,備嘗艱勤。續雖在孩抱,奉之不異長君,有事輒長跪請白,然後行之。閭里感其行,皆相率脩義。"
  3. 같은 권, 續年十歲,善與歸本縣,脩理舊業。告奴婢於長吏,悉收殺之。時鍾離意為瑕丘令,上書薦善行狀。光武詔拜善及續並為太子舍人。"
  4. 같은 권, "善,顯宗時辟公府,以能理劇,再遷日南太守。從京師之官,道經淯陽,過李元冢。未至一里,乃脫朝服,持鉏去草。及拜墓,哭泣甚悲,身自炊爨,埶鼎俎以脩祭祀。垂泣曰:「君夫人,善在此。」 盡哀,數日乃去。"
  5. 같은 권, "到官,以愛惠為政,懷來異俗。遷九江太守,未至,道病卒。續至河閒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