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룡

대한민국의 조직폭력배, 영화 제작자

이화룡(한국 한자: 李華龍, 1914년 7월 20일~1984년 2월 24일)은 일제강점기의 전직 유도인 출신의, 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였으며, 한때는 영화제작자로도 활약하였었다. 별명으로는 명동의 황제·신사·박치기왕 등으로 불리었었다.

이화룡
신상정보
출생1914년 7월 20일(1914-07-20)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양부
사망1984년 2월 24일(1984-02-24)(69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고려대학교 부속 병원
매장지대한민국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거주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별남성
국적대한민국
직업유도인, 청년운동가, 사회운동가, 영화제작자
172cm
형제누나 2명
배우자임봉옥
자녀2남 4녀
활동 정보
활동 기간1936년~1971년
경력화성영화사 사장
웹사이트이화룡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평남 평양 출생으로 ‘박치기왕’, ‘명동백작’, ‘검은 신사’ 등의 별명으로 이름을 알렸다.

김구신익희가 모두 몰락하고 2인자로 떠오른 이기붕한테 자유당 당원 제의가 왔으나, 거절하기도 했다.

명동파를 이끌며 이정재동대문사단과 대립한 끝에 1958년 충정로 도끼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이 덕분에 이정재를 비롯한 폭력배들이 5.16 쿠데타로 몰락하는 와중에 명동파는 화를 피할 수 있었다. 1960년 이화룡은 화성영화사를 차려 영화사업에 투신하며 조직폭력계를 떠났고, 조직은 신상현이 넘겨받았다. 연예계를 어용화하여 관제영화나 제작하던 임화수 등과 달리 이화룡의 화성영화사는 《박서방》, 《주마등》, 《마부》, 《임자 없는 나룻배》, 《장희빈》 등 쟁쟁한 작품들을 내놓았다. 화성영화사는 1967년 등록취소되었다. 그 후 영화 분야를 떠나 1971년까지 여타 사업에 투신하였었다.

1984년 2월 24일 0시 56분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고대병원에서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묘는 선영이 있는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현 하남시)에 안장됐다.[1][2]

출연 작품 편집

TV 드라마 편집

각주 편집

  1. 서울의 깡패 생태 유혈소동의 내막과 세력분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동아일보 1958년 9월 21일
  2. 박치기왕 이화룡씨(70)[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경향신문 1984년 2월 24일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