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충(鄭沖, ? ~ 274년)은 중국 삼국 시대 사람으로, 문화(文和)며 사주(司州) 형양군(滎陽郡) 개봉현(開封縣) - 동한의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사례(司隷) 하남윤(河南尹) 개봉현(開封縣) - 사람이다.[1]

행적 편집

본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청빈하여 경사를 연구하기를 즐겼고 유학뿐 아니라 제자백가에도 박식했다.[1]

위 문제가 태자가 되었을 때 태자문학이 되었고, 상서랑이 되었으며, 외직으로 나가 진류태수가 되었다.[1] 조상이 보정할 때에는 종사중랑이 되었고 산기상시, 광록훈으로 승진했다.[1] 가평 3년(251년) 12월, 사공이 되었다.[2] 감로 원년(256년) 10월에는 사도가 되었다.[2] 경원 4년(263년) 12월 19일에는 태보가 되었다.[2] 그 지위는 3공보다 높았으며, 또 수광후(壽光侯)에 봉해졌다.[1] 촉을 평정한 후, 진 문제는 가충, 양호 등에게 예의와 율령을 정하게 했으며, 이들은 먼저 정충에게 묻고 나서야 시행했다.[1]

태시 원년(265년), 서진이 세워진 후 태부가 되었고, 작위는 수광공(壽光公)이었다.[1] 사례교위 이의, 어사중승 후사광이 정충과 하증, 순의가 질병을 이유로 조회에 나오지 않으니 면직해야 한다고 상주했으나, 무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 정충은 태시 9년(273년)에 다시 은퇴하기를 구했고, 이듬해에 죽었다.[1] 무제는 조당에서 슬퍼했고, 태부를 추증했으며, 시호를 성(成)이라 했다. 아들이 없어 조카 정휘(鄭徽)가 뒤를 이었고, 정휘가 죽고 아들 정간(鄭簡)이 이었다.[1]

가계 편집

 

각주 편집

  1. 방현령 등, 《진서》 권33 열전 제3 왕상정충하증석포전
  2. 진수, 《삼국지》 권4 삼소제기
전임
사마부
조위의 사공
251년 12월 ~ 256년 10월
후임
노육
전임
고유
조위의 사도
256년 10월 ~ 263년 12월 19일
후임
종회
전임
-
(황조 수립)
제1대 서진의 태부
265년 12월 ~ 274년
후임
하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