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曺雲, 1900년 7월 22일~?)은 일제강점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시조 작가대학 교수였다. 본명조주현(曺柱鉉)이고, 관향(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정주랑(靜州郞)이다.

조운
작가 정보
본명조주현(曺柱鉉)
출생1900년 7월 22일(1900-07-22)
대한제국 전라남도 영광군
사망?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직업시조 작가대학 교수
학력전남목포고등상업학교 졸업(1917년)
경력국민문학운동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필명자(字)는 중빈(重彬)
아호(雅號)는 정주랑(靜州郞)
활동기간1921년~1948년
장르시조
배우자있었음(이름 미상. 1929년 결혼. 1948년 함께 월북.)
자녀1남 2녀(1948년 모두 함께 월북.)
형제조분녀(이복 누나)
친지최서해(이복 자형)

전라남도 영광에서 출생하였으며, 1년 연하의 소설가 최서해(본명 최학송, 1901년생~1932년졸)는 그의 배다른 자형(이복 매부)으로, 일곱살 터울이 있는 친가 배다른 서얼 누나 조분녀(1893년생~1982년졸) 여사의 8년 연하남 부군이기도 하다.[1]

생애 편집

목포상업전수학교(지금의 목상고등학교)를 나와 영광농업보습학교(지금의 영광중학교)에서 농업 교사 등으로 교편을 잡으면서 사회 계몽 운동을 하였다.[1] 1921년동아일보》에 <불살너주오>를 발표한 후부터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띤 현대 시조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 〈나의 사람〉, 〈법성포 12경〉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1947년 《조운시조집》을 발간하였다.[1]

그는 1926년 최남선·이병기 등과 함께 '국민문학운동'에 참여해 시조부흥론을 주장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동국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1] 이후, 1948년 3월 중순 당시에 가족과 함께 월북하였다.[1]

주요 경력 편집

월북 이후 편집

조운은 월북 이후 월북 문인이라는 이유로 이름이 잊혀졌으나, 1988년 월북 문인 해금 조치가 발표되어 학계에 알려져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1]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0년 7월 22일에 맞추어 '조운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주도로 《조운시조집》을 복간하였으며, 그의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의 교육청 부지에 시비 건립을 추진하였다.[1] 하지만 21일 밤 교육청측에서 중장비를 동원하여 시비의 기단부를 훼손하여 제막식이 열리지 못했으며,[2] 결국 2000년 9월에 제막식을 가졌다.

각주 편집

  1. 한승주 (2000년 7월 10일). “잊혀진 대시인 조운, 100년만에 조명”. 국민일보. 
  2. 이성섭 (2000년 7월 27일). “민족문학작가회의, 조운시비 훼손관련 회견”.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