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토론:오선 (여말)

오선(吳僐:1284.7.5~1366.9.25)는 고려 말의 문신이다. 초년 휘는 방원(方愿)이고, 자는 백아(白雅)이며, 호는 눌제(訥齊)이다. 본관은 동복(同福)이며, 부인은 밀직사사좌부승지 송잠의 딸 부인 여산송씨이다. 아버지는 구성군(龜城君) 오잠(吳潛)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공민왕의 어머니)의 고종사촌인 이천신씨이다. 외할아버지 신진(申瑨)은 정3품 상서(尙書)를 지낸 이천서씨의 시조로, 충혜왕과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충숙왕의 비)의 고모부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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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은 고려조에 여러 관직을 거쳐 고려 공민왕 임진년(1352년) 7월에 봉익대부 밀직사 우문관판부사 구성군에 봉해졌다.

신돈과의 정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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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이 불법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정세운,류탁과 함께 공민왕에 아뢰거늘 "신돈은 반드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릴 것입니다."하니, 공민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선정세운(鄭世雲: ?∼1363)은 신돈을 요승이라 하여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신돈은 왕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피해 다녔다. 신돈은 이 때문에 다시 머리를 깎고 두타(頭陀)가 되었다. 신돈이 다시 궐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승경과 정세운이 죽은 1363년 11월 3일 이후였다.

신돈의 득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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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오선(吳僐)은 왕실 측근의 사의(私議)로 장차 집안에 큰 화가 닥칠 것을 예견하고, 공민왕 재위 을사년(1965년) 9월에, 5남3녀와 손자들을 거느리고 광진(廣津-지금의 서울 광진구)으로 피신하여 아차산 아래에 축대를 쌓고 은거하다가 1366년 9월에 졸하였다.

개혁세력 신돈명덕태후의 적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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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맥락과 혈통적 맥락으로 보면, 오선(吳僐)은 고려의 기득권세력이자, 오선(吳僐)의 어머니가 명덕태후와 고종사촌 지간의 혈통적 맥락과 배경에서 기득권세력의 좌장이었던 명덕태후를 뒷 배경으로 신돈의 제거에 앞장 설 수도 있었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개혁세력 신돈과의 정치적 갈등은 공민왕명덕태후의 갈등이다.

이승경과 정세운이 죽은 1363년 11월 3일 이후, 신돈의 정치적 등장은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를 비롯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득권 세력의 이러한 반발은 신돈이 집권한 뒤에도 계속되어, 공민왕 재위16년 10월에는 오인택(吳仁澤)·오선(吳僐)·경천흥(慶千興)·목인길(睦仁吉)·김원명(金元命)·안우경(安遇慶)·조희고(趙希古)·이희비(李希泌)·한휘(韓暉)·조린(趙璘)·윤승순(尹承順) 등의 모반 사건이 있었으며, 공민왕 재위17년 10월에도 김정(金精)·김흥조(金興祖)·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김제안(金齊顔)·김구보(金龜寶)·이원림(李元林)·윤희종(尹希宗) 등이 신돈을 죽이려는 계획이 적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기득권 세력의 이러한 반발에는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가 개입되어 있었다. 신돈명덕태후의 외척인 김원명의 소개로 공민왕과 처음 만났으나, 신돈명덕태후는 서로를 꺼려하는 사이였다. 역사적 예로, 공민왕 재위15년 8월에 있었던 연회석에서 명덕태후는“미망인이 어찌 감히 외부의 중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있겠는가.”공민왕에게 말하면서, 신돈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다. 또한, 공민왕 재위18년 5월에는 어찌 신하에게 정사(政事)를 맡겨서 공(功)이 있고 죄(罪)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크게 토목공사를 일으켜 화기(和氣)를 손상케 하는 것입니까?”라고 공민왕에게 말하거나 “왕은 나이가 어리지도 않는데 어찌 나라의 권력(國柄)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명덕태후는 신돈에게 정권을 맡긴 공민왕을 질책하기도 하였다. 명덕태후신돈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은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고 있는 주체가 자신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공민왕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후(母后)께서는 어찌 자식의 허물 드러내기를 이와 같이 하나이까?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은 신(臣)의 죄(罪)가 아니라 다만 난신(亂臣)을 금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하면서, 신돈을 보호해 주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신돈이 제거되기 3개월 전까지 모후 명덕태후와 접촉을 끊었다.

이성계와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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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때에 이성계가 개성(開城)에 올라왔을 때에 오선(吳僐)이 이성계와 회동한 후, 그가 귀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오선의 아들 오중화(吳仲華)를 이성계에게 부탁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늙어서 멀지 않아 죽게 되었으니 뒷날 내 자식을 잘 보호해 주시오."

이성계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오중화를 후하게 대접했다가, 즉위하자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를 삼았다. 그러나 중화의 천성이 단정하지 못하여 거짓말을 만들어서 남을 의혹(疑惑)하게 하므로 마침내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능력미달이었던 것이다.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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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오잠(예문관대제학,찬성사,구성군에 봉해짐)
  • 모-부인 이천신씨(공민왕의 생모인 명덕태후(明德太后)의 고종사촌)(부;신진-상서)
    • 본인-오선(고려 봉익대부 밀직사우문관판총부사, 구성군에 봉해짐)
    • 배우자-부인 여산송씨(부:송잠-밀직사좌부승지)
      • 자-오중화(삼사좌복야, 검교참찬문하부사)
      • 자부-영가군부인 권씨(부:권염-현부군,조부:권준-찬성사,증조부:권박-예문관대제학,외조부:양원조-찬성사)
      • 자-오덕필,오성필,오자귀,오육화
      • 사위:김달양,이순창,류봉림
  • 고모부-류청신(문하시중)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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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동복오씨 족보

조선왕조실록(1396/10/17(太祖 5年/丙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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