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 박씨(泰仁朴氏)는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혹칭 태산 박씨(泰山 朴氏)라고도 한다.[1] 현재 밀성 박씨 돈재공파(遯齋公派)로 복관 되었다.

태인 박씨
泰仁朴氏
이칭태산 박씨(泰山朴氏)
나라한국
관향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시조박거인(또는 박연생)
원시조박혁거세(朴赫居世)
중시조박현손
집성촌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전라남도 나주군 다시면 동곡리
전라남도 영광군 동부면 일원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방축리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만운리
주요 인물박연생, 박수온, 박수량, 박수공, 박수검, 박사우, 박상의, 박상지, 박행중, 박세대, 박은용, 박권상
인구(2000년)456명

역사 편집

시조 박거인(朴居仁)은 고려 문종 때 도평의사사사 박언상(朴彦祥)의 후손으로, 고려 공민왕 때 소감(少監)을 역임하고 인의현(현재의 태인)에 유배되어 그곳에 살게 되었다.[2][3]

아들 박승봉(朴承奉)은 고려가 망하자 절개를 지키고 은거하였다고 한다.[4] 손자 박덕명(朴德明)은 1402년(태종 2) 무과에 합격하여 호익부사정을 역임하였는데, 태인에서 장성 소곡(小谷. 현재 아곡리 하남)으로 입향하였다.[5]

증손자 박연생(朴衍生)은 단종때 충무시위사 대호군을 역임하고, 세조 원년에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6]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정치적 위험을 느낀 그는 고향 태인으로 내려와 아버지 박덕명(朴德明)을 모시고 장성현 소곡(小谷. 현재의 아곡리 하남)으로 은거하였다가, 말년에 사위 이석손(李碩孫)이 살고 있는 담양 월산에 은거하고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호를 돈재(遯齋)라 하고 본관을 태인(泰仁)으로 하였다.[7][8]

이후 후손들이 돈재공 박연생(朴衍生)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태인(泰仁)으로 하여 호남영남에서 번성하였다. 중시조는 돈재공 박연생의 손자 박현손(朴賢孫)이다.

박연생의 현손 박수량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우참찬·중추부지사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또 현손 목우당 박수공(朴守恭)도 참봉을 지내고 독행군자(篤行君子)이라 일컬어 졌다. 후손 박사우(朴思禹)는 진안현감, 백우당 박상의(朴尙義)는 사제감주부, 박상경(朴尙敬)은 창평현령, 박상근(朴尙謹)은 거창현감을 지냈다. 눌헌 박상지(朴尙智), 매헌 박행중(朴行重), 초당(草堂) 박세대(朴世大)는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본관 편집

태인(泰仁)은 전라북도 정읍군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1409년 (태종 9년) 태산(泰山)과 인의(仁義) 두 고을을 합쳐서 만든 태인(泰仁)에서 유래하는데,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을 뜻한다.

태산현은 본래 백제의 대시산현(大尸山縣)을 신라 경덕왕이 태산(太山)으로 고쳐 대산(大山)․태산(泰山)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공민왕 때 군으로 승격되었다. 인의현은 백제 때 빈굴(賓屈)․빈성(斌城)․부성(賦城) 등으로 불리다가 신라 때 무성(武城)으로 고쳤다가 고려 때 인의(仁義)로 고쳤다. 1411년(조선 태종 11)에 태산(泰山)과 인의(仁義)를 합하여 태인현(泰仁縣)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군으로 승격되고 1913년정읍군에 합해져 태인면이 되었다.

본관 양분 편집

  • 돈재공 박연생이 본관을 태인으로 함 : 1453년 계유정난 후 돈재공 박연생이 본관을 태인(泰仁)으로 하였다.[9]
  • 태인 박씨 족보 발간 : 1687년(숙종 13) 돈재공 박연생의 8대손 매헌 박행중(朴行重)이 돈재공 박연생 자손만으로 합보하여 태인보(泰仁譜)를 발간함. 1세조를 돈재공 박연생으로 하고, 중시조는 손자 박현손(朴賢孫)으로 하였다.[10]
  • 밀성으로 복관 : 1831년(순조 31) 본관을 태인으로 개관한지 378여년이 지나 돈제공 박연생의 현손 우참찬 박수량의 9세손 박규혁(朴圭爀)등이 중심이 되어 예조에 상소를 올려 본관을 밀성으로 복관하였다.
  • 태인으로 존치 : 돈제공 박연생의 종손 참봉 박수온의 후손들 중 백우당 박상의(朴尙義) 후손들을 중심으로 한 후손들은 조상의 뜻을 받들어 현재에도 여전히 본관을 태인으로 하고 있다.
  • 현재 : 돈제공 박연생의 후손들 중 복관 상소파인 『밀성박씨 돈재공파』와 잔류파인 『태인 박씨』가 공존하고 있음. 따라서 이들은 한 조상으로부터 분적된 것이 아니라, 한 조상을 두고 후손들끼리 양분되어 본관을 달리하고 있을 뿐임.[11]

인물 편집

고려 편집

  • 박승봉(朴承奉, ?~?) : 박거인의 차자, 호 의재(義齋), 지기가 청백 위엄 출중하였으며, 고려가 망하자 절개를 지켜 은거하고 벼슬을 하지 않아 고려 의사(義士)라 칭함

조선 편집

  • 박덕명(朴德明) : 1402년(태종 2) 무을과 합격, 호익순위사 우영 부사정(副司正), 아치실 입향조[12]
  • 박연생(朴衍生) : 호 돈재(遯齋), 단종 때 충무시위사 대호군, 세조의 왕위 찬탈에 개탄하여 사위 돈암(遯菴) 이석손(李碩孫)[13]이 살고 있는 담양군 월산면 월산에 은거함, 세조와 절친한 사이로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고,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음[14], 수산사 주향
  • 박문아(朴文雅) : 증손 박수량이 귀해져 어모장군 대호군,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증직
  • 박현손(朴賢孫) : 선략장군, 손자 박수량이 귀해져 이조참판 증직,[15] 중시조
  • 박종원(朴宗元. ?~1527) : 아들 박수량이 귀해져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의금부사 증직,
  • 박수온(朴守溫) : 경학으로 천거(薦擧), 선교랑 경기전 참봉, 후손 고창군 거주
  • 박수량(朴守良. 1491~1554) : 조선 중종 문과 급제, 좌찬성, 한성부 판윤, 의정부 좌참찬, 지중추부사, 청백리, 사당 장성 아곡리 하남, 묘 금호리 호산, 수산사 배향. 후손 황룡면 아곡리 거주
  • 박수공(朴守恭. 1500~1559 이전) : 호 목우당(牧友堂), 참봉[16], 독행군자(篤行君子)라 일컬어짐. 후손 영광군 염산면 거주
  • 박수검(朴守儉) : 참봉, 사위 서태수·박시영·기효간, 후손 광산군 삼도면 거주
  • 박사영(朴士瑛) : 선교량
  • 박사침(朴士琛) : 훈련원 습독. 습득공파 파조
  • 박사순(朴士珣) : 어모장군, 백우당 박상의 부친
  • 박사우(朴思愚) : 호 청절당(淸節堂), 진사시 합격, 의금부도사, 진안현감
  • 박사로(朴思魯) : 풍저창봉사
  • 박상의(朴尙義. 1538~1621) : 호 백우당(栢友堂), 풍수지리 대가, 임진왜란 예언, 사재감주부,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 수산사 배향
  • 박상지(朴尙智) : 호 눌헌(訥軒), 학문으로 군자감 봉사, 예빈시 별검, 수산사 배향. 후손 황룡면 금호리 거주
  • 박상근(朴尙謹) : 호 한적당(閒適堂), 거창현감, 진주 진영 병마첨절도사
  • 박행중(朴行重. 1641~1689) : 호 매헌처사(梅軒處士), 백우당 박상의 손자, 우암 송시열 문인, 각재 김기하와 도의로 사귐, 경학에 깊었으며 실천적 선비가 됨, 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추증, 『태인 박씨 족보』 발행, 매헌공파 파조. 후손들 황룡면 관동리 거주
  • 박세대(朴世大) : 학문으로 이름을 세상에 드러냄
  • 박봉휴(朴鳳休. 1716~1805) : 호 죽와(竹窩),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증직, 장령 울산인 김수조 묘갈명 찬
  • 박형종(朴亨宗) : 호 추계(秋溪), 남원시 입향조
  • 박이종(朴李宗) : 호 노정(蘆亭), 고창군 노동 입향조
  • 박정종(朴貞宗) : 호 보헌(普軒), 고창군 해리·구례군 입향조
  • 박계종(朴繼宗) : 호 야당(野塘), 홍문관 교리, 경북 안동시봉화군 입향조
  • 박준(朴俊) : 여절교위, 안동 풍산 거주
  • 박호인(朴好仁)·박호례(朴好禮)·박호신(朴好信) : 삼형제가 동시에 무과 급제, 임진왜란 때 안동지역에서 의병 활동[17], 후손들이 현재에도 본관을 태산(泰山)으로 하고 있음
  • 박호례(朴好禮) : 훈련원 봉사

박시형의 옥중 탄원서 편집

  • 증조부 : 박승봉(朴承鳳) - 중랑장(中郞將)
  • 조부 : 박영보(朴英寶) - 갑사(甲士)·사정(司正)
  • 부 : 박홍(朴鴻) - 학생(學生)
  • 박시형(朴時衡) : 문과 급제, 예문관, 《예종대왕실록》 수찬관, 1468년 옥중 탄원서에 출신지 전라도 장성현 소곡(小谷) 및 집안 가계를 서술하고 있음.[18]

근·현대 편집

  • 박은용(朴殷容. 1880~1949) : 족보명 박위용(朴爲容),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 1919년 파리장서운동 서명 및 기산도 등과 독립군자금모집 활동
  • 박권상(朴權相. 1929~2014) : 대한민국KBS 방송국 사장, 한국의 언론인
  • 박래호(朴來鎬. 1943~) : 호 노강(蘆江), 전 성균관 부관장, 장성 필암서원 선비학당 학장, (사)장성춘추회 회장

과거 급제자 편집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명, 무과 3명. 생원시 1명, 진사시 2명, 의과 1명, 음양과 1명등 과거 급제자 6명을 배출했다.

고려 문과

박윤화(朴允和)

조선 문과

박수량(朴守良)

무과

박호례(朴好禮), 박호신(朴好信), 박호인(朴好仁) 동시 급제

생원시

박정린(朴廷麟)

진사시

박수량(朴守良), 박사우(朴思愚)

의과(醫科)

박평(朴平)

음양과(陰陽科)

박성남(朴成男)

항렬자 편집

집성촌 편집

각주 편집

  1. 태산(泰山)은 태인(泰仁)의 별칭(別稱)이다.
  2. 박언상(朴彦祥)[1] Archived 2016년 9월 22일 - 웨이백 머신
  3. 《삼국사기》에는 경명왕의 왕비 및 자녀들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동생 박위응이 경애왕이다.
  4. 박거인은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가 박문봉(朴問奉)이고, 차자가 박승봉(朴承奉)이다.
  5. 오산지(鰲山誌) 및 동사열평(東史列評)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三等)에 녹훈되었다.
  7. 1456년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고, 친구인 단종의 국구 송현수도 이에 관련되어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단종1457년에 사사되었다.
  8. 東史列傳과 潭陽邑輿誌, 鰲山邑輿誌
  9. 호익부사정 박덕명(朴德明)이 아들 돈재공 박연생과 함께 태인에서 장성고을 소곡(小谷. 현재 아곡리 하남)으로 들어와 입향조가 됨
  10. 족보 제작에는 족질 박세대(朴世大)가 도왔다. 박행중은 박종원의 장자 참봉 박수온의 후손이며, 박세대는 박종원의 차자 우참찬 박수량의 후손이다.
  11. 청백리 박수량을 비롯한 현출된 조상 및 출가한 딸들의 대한 문헌 및 비문에 본관이 태인(泰仁)으로 기록되어 있음
  12. 박덕명(朴德明)[2] Archived 2017년 2월 2일 - 웨이백 머신
  13. 이석손(李碩孫. 1397~1481)
  14. 박연생은 정순왕후 송씨의 아버지인 국구(國舅) 송현수(宋玹壽)와 고향 지기였다. 1456년(세조 2년)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사육신금성대군(錦城大君)ㆍ송현수(宋玹壽)등이 역모죄로 참살되고, 1457년 (세조 3년)에 단종도 사사되자, 정치적 위험을 느껴 고향 태산현으로 내려와 은둔함
  15. 동생 박귀손(朴貴孫)은 참봉으로 후사가 무후하고, 사위 울산 김씨 금구훈도 김환(金丸)의 후손인 외손이 번창함
  16. 《하서전집》: 박씨 아저씨【수공(守恭)】의 만사- 참찬(叅贊)으로 기록되어 있음
  17. 김해 항병일기-조전장수 박호인 기록, 조정 서해일기-박호례 기록, 곽재우 창의록에 화왕입성동고록-박호례·박호신 기록
  18.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1468) 3월 25일 을유 4번째기사 ′박시형이 옥중에서 글을 만들어 억울함을 호소하다′.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