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규원사화

마지막 의견: 15년 전 (Jtm71님) - 주제: 규원사화와 의사 역사학

규원사화 진서론 편집

'토론란'의 용도를 잘 알지 못할 때 적었던 글로, 삭제글 처리하여 숨겨놓습니다. jtm71 (토론) 2008년 6월 17일 (화) 17:33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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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몇 위서론에서는 규원사화를 ‘환단고기류’로 표현하면서 위서를 주장하고 있으나, 규원사화는 단기고사, 환단고기에 사용되었던 방법으로는 위서임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이 곳에 제시해 봅니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의 글이나 여기에 제시한 이외의 규원사화 위서론은 대환영입니다.)

1) 규원사화는 진본이 없다.

조선 시대에 제작된 필사본이 있으며, 이미 정통 사학자에 의해 그 진본임이 검증되었습니다. (본문 참조) 검증을 통과했다는 것은, 시대에 저술 시대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는지 여부를 포함하여, 위서로 제작되었을 근거를 찾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아쉬운 점은, 남아있는 원본이 필사본일 수도 있겠지만, 그 연대를 검증할 수 있는 원본에 대한 연대측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결과만 얻어낼 수 있다면 여타의 위서론은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2) 몇 가지 당시에 쓰이지 않았다고 지적된 단어들이 있다.

壬辰之役, 先民, 民氣, 强國之要, 天主 등인데, 이 중에서, 壬辰之役, 先民, 民氣 세 단어는 이미 숙종 이전부터 널리 쓰이고 있었습니다. 天主 는, 규원사화에 대진국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쓰이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强國之要'는, 단지 '강한 나라의 조건'이라는 의미로 이 말을 굳이 당시에 썼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3) 20세기 초에 북애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첨성대의 축조 시기가 틀렸다.

동명이인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20세기의 북애자는 규원사화의 북애자를 따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연대에 대한 기록이 틀린 것은 위작이 아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작의 경우는 일부러 제3인의 인증을 덧붙여서까지 그 연대가 옳음을 증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4) 태평성대의 시기인데,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다.

이는 규원사화의 내용과 조선왕조실록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연이은 전쟁으로 나라 살림은 피폐하고, 전국에는 돌림병이 창궐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숙종 임금 조차도 병을 앓았다는 것은 당시의 위기감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북애자 자신도 저술이 끝날 때까지를 예측할 수 없음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문맥으로 보아도 과거의 융성했던 시기에 비해 침체된 현실을 한탄하는 것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이 부분에 문제를 제기한 이유가 규원사화를 위서일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5) 고려사의 인용이 틀렸다. 그런데, 후일 편찬된 해동역사에서 같은 내용으로 인용되었다.

해동역사에서 규원사화를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또는 의식적으로 규원사화로부터의 직접적인 인용을 피한 듯합니다. 규원사화의 내용은, '청을 멸하고 명을 되살리자'는 당시의 주장과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해동역사 지리서의 해당 부분은, 규원사화에서 제시된 여러 중국 서적의 인용문들과 고려시대의 기록, 백두산의 명칭에 대한 개인적인 추측이 인용되었습니다. '전거한 자료의 출처를 밝혔다'는 것은, '~에서 이르기를 ...' 과 같은 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규원사화나 해동역사 모두 출처를 밝힌 것은 같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추측 부분은, 규원사화는 스스로의 생각으로, 해동역사는 다른 실학자의 의견으로 적고 있을 뿐입니다. 주목할 점은, 한진서가 스스로의 추측을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의 의견인 이상, 인용한 서적과 내용들은 의견을 제공한 이로부터 모두 전해받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해동역사는 매우 방대한 양의 자료를 자랑하는 역사서입니다. 그만큼 틀린 곳도 많습니다. 이는, 여러 사람의 도움에 의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줍니다. 즉, 해동역사 지리서의 내용은, 규원사화의 내용을 알고 있는 누군가로부터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6) 고려시대의 기록이 틀렸다. 진역유기의 인용문 중에 고려시대의 역사책에 사용하지 않는 한자가 사용되었다.

최소한 청평은 고려말 사람입니다. 고려인의 칭호는 조선 시대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산속에 거하는 도인이 감추어 놓고 쓰는 책에서조차 일반적인 역사책의 규칙을 따라야 할까요 ...

또한, 공민왕 때는 단군 이래의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는 시기였습니다. 백문보가 단기를 쓸 것을 주장한 것은 그 영향이었고요 ...

7) 규원사화와 부도지는 20세기가 되어서나 발견되었다. 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

20세기 초는 어느 시기 보다도 단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시기였습니다. 수요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소장하던 책을 전해 주었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특히, 언론매체가 발전하면서 전달이 용이해졌을 것입니다. 해방 후에 새로이 발견된 서적들은 많습니다. 이들이 모두 위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8) 단군은 수명이 210세에 재위 기간이 93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200살을 넘게 살 수 없다.

이는 단군의 수명이 1500살이라는 삼국유사의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210년은 신라의 진골, 성골 같은 순수 혈족의 통치 기간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 규원사화에는 단군의 수명(壽)이 210세라고 적혀 있지 않습니다. 어쨌든, 한 인물이 93년을 통치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이상, 규원사화에 대하여 제시된 위서론은 그 내용을 살펴볼 수록 규원사화가 진서라는 심증을 굳히게 합니다. 시대적으로 볼 때에도, 역사의 위조는 후대로 갈 수록 구체화되고 자세하여 지는 것이 통상적인 과정인데, 규원사화와 단기고사, 환단고기의 관계는 그 반대입니다. 앞서서 소개된 책이 더욱 그럴 듯합니다. 이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가 그 저술된 경로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jtm71 2006년 5월 12일 (금) 21:19 (KST)답변

기타 의견 편집

현재까지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위서론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만, 나머지는 이 위치에 추가하겠습니다. jtm71 2006년 4월 29일 (토) 23:29 (KST)답변

규원사화에 "위서 논쟁" 항목을 만들어 정리하면 어떨까요? 위서 주장도 같이 정리하고요. --Klutzy 2006년 5월 6일 (토) 16:32 (KST)답변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진행 중인 내용은 뒷면에 두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문서에는 링크만 걸어 두면 되겠죠. jtm71 2006년 5월 12일 (금) 20:57 (KST)답변
환단고기의 위서론을 반박하는 것은 위키백과와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문에 두 주장을 모두 싣는 것이 백과사전으로서 양쪽의 주장을 소개하는 역할로서 더 충실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위서냐 아니냐 라는 것을 토론하는 것은 학계(강단 사학계 및 재야 사학계)의 일이니 그쪽 동네 친구들보고 하라고 하고, 여기서는 동등한 수준으로 두 주장을 모두 싣고, 이런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라고 써주는 게 맞다고 봅니다. 진행 중이라면, 진행 중인 내용이라고 쓰면 됩니다. 어느 한쪽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판명되면 (아마 새로운 근거자료가 나오기 전에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때는 "예전에 이런 논란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결론났다"라고 써야 겠지요. 요약하자면, 제 생각은 위의 내용들 - 위서론자들의 주장과, 진서론자(?)들의 주장 - 들을 일목요연하게 싣는 것입니다. 그게 백과사전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WaffenSS 2006년 5월 13일 (토) 04:13 (KST)답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이곳으로 가져 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차피 진위논란은 양측의 의견이 소개되는 것이고,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누군가가 결론을 내주는 것 보다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싣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됩니다. 본문 내용은 다시 검토하여 중립성을 지키도록 하죠. jtm71 2006년 5월 13일 (토) 23:00 (KST)답변

토론 문서는 말 그대로 "토론"하는 곳입니다. 일반 문서에서는 토론 문서로의 링크를 하지 않고요. WaffenSS님의 말처럼, 양쪽의 주장을 공평하게 싣는 게 어떨까요? --Klutzy 2006년 5월 13일 (토) 23:12 (KST)답변

...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형식은 표로 정리하는 것이 좋을까요 ... jtm71 2006년 5월 13일 (토) 23:20 (KST)답변
형식이 중요하겠습니까만은, 표로 하게 되면 일일이 대조해서 볼 수 있으니 좋겠지만, 가독성에 문제 생길 지도 모릅니다. 여러가지 형식을 시험해보고 결정하시죠. --WaffenSS 2006년 5월 13일 (토) 23:38 (KST)답변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취지에 적합한 글이 올려지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이상, ‘공평’의 기준은 애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진위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양측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공정할까요 ... 아니면 학계의 의견을 우선적으로 반영해야 할까요 ... 학계의 중론을 반영한다면 어떤 기준으로 산정해야 할까요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았음을 인식시키고 양측의 의견을 가감 없이 수록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모두 본문에 싣기에는 그 양이 많고, 논문을 인용하는 것이므로 저작권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토론란에 정리한 것이었으나, 그 내용이 본문으로 옮겨간다고 하더라도, 위서론의 항목과 그 반박의 글이 되는 것은 큰 변화가 없습니다. 결국 비슷한 글이 전면에 놓이는 것이죠. 양측의 의견이라고 하면, 한 쪽은 위서를 주장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를 반박하는 것으로, 반박에 대한 반박은 없다고 보아도 될 정도이므로, 일방적인 글이 되기 쉽습니다. 이를 ‘중립’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을 듯 합니다. 앞서 표로 정리하겠다고 하였으나, 이로 인한 제반문제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어야 할 듯 싶습니다. jtm71 2006년 5월 13일 (토) 23:54 (KST)답변

진서, 위서 양측 주장과 각 국가 학계의 중론을 정리해 놓되, 어느 한 쪽이 맞다는 내용을 제외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학계에서 얼마나 신뢰하는 사료인지도 중요한 자료일 테니까요. --Klutzy 2006년 5월 14일 (일) 01:26 (KST)답변

규원사화와 의사 역사학 편집

최소한 규원사화는 대한민국 학계 일부와 북한 학계에서는 비중 있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jtm71 (토론) 2009년 4월 29일 (수) 22:07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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