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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인용 관련 편집

몇몇 책을 뒤져 봤습니다만, 북부여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가설을 주르륵 늘어 놓았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환단고기는 명쾌하게 설명을 하는데 말이죠.. 막 쓸 수도 없고 -_- 난감하네요.)

더불어서 졸본 부여를 부여 페이지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졸본부여를 한 나라라고 말하면 사실상 고구려나 다름없는 나라인데 말이죠.

그리고 참, 아버지아들을 내쫓다니... 하긴 그 시대엔 무슨 일이든 다 가능했으니까요. --DDamY

  1. 아무리 명쾌하게 설명한다고 해도 환단고기는 어디까지나 위서입니다. 만약 기록한다면 "환단고기 기록" 이라고 따로 명시해야 할 것입니다.
  2. 졸본부여부여 페이지에 포함시키는 건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 Caffelice 2004년 8월 13일 (金) 14:47 (UTC)

부여의 성립 시기 편집

'늦어도 기원전 238년'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내용을 참조하여 기원전 2세기로 고칩니다. jtm71 (토론) 2009년 1월 8일 (목) 18:20 (KST)답변

'2.3 부여의 역대 국왕'과 관련하여 편집

중간에 갈사왕이 나와있는데 갈사왕은 북부여나 동부여의 왕이 아니라 갈사부여의 왕이므로 제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 부탁드립니다. 한민족 (토론) 2016년 1월 4일 (월) 01:22 (KST)답변

북부여, 동부여, 갈사부여, 졸본부여, 부여, 남부여 등 부여와 관련된 국명이 많습니다. 갈사부여를 건국한 갈사왕은 부여 금와왕의 아들이고, 대소왕의 동생입니다. 고구려 대무신왕과 전투에서 대소왕이 전사하자, 그 동생이 부여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이동하여 갈사수 근처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데, 대체로 부여의 한 갈래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6년 7월 24일 (일) 21:35 (KST)답변
갈사국이 부여의 한 갈래라는 것과 부여의 국왕은 다릅니다. 언젠가... 싹- 수정하겠습니다. 일단술먹고합시다 (토론) 2016년 7월 26일 (화) 00:06 (KST)답변
부여가 다른 고대국가들처럼 수백년 간 지속된 단일한 하나의 국가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동부여, 북부여, 부여, (서부여?), 갈사부여 등 다양한 정치 세력 집단을 통칭하는 말인지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건국설화에 나오는 동명왕과 해모수, 그 뒤에 나오는 금와왕과 대소왕, 그 뒤에 등장하는 의려왕과 의라왕 등이 모두 동일한 '부여'라는 국가의 왕인지, 아니면 여러 부여계 국가들의 왕인지 다소 의문이 있습니다. 동부여와 북부여가 같은 국가인지, 이후 선비족과 전쟁을 겪은 부여가 동부여의 후예인지 아니면 북부여의 후예인지 아니면 그냥(?) 부여인지 등 명확하지 않은 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부여의 국왕은 중간에 끊어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세보가 연결이 잘 안 됩니다. 하나의 계보로 이어지는 단일 국가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신라의 경우에는 초기에 박/석/김 씨 왕조가 바뀌었지만, 고려 시절에 《삼국사기》에서 왕가 계보를 정리하여 박-석-김으로 이어지는 단일한 국가로 확정되었는데, 부여의 경우 후대에 그런 작업이 없었기 때문에 단일 왕조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6년 7월 30일 (토) 19:07 (KST)답변
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어찌 됐든 갈사국은 부여라고 안 했으니 해당 사항이 없네요. 관련 사항은 토론:갈사국에 있었으니 참고 바랍니다. 현재 각종 부여 문서들이 비전문가의 출처를 기준으로 하였거나, 전문가들의 해석을 제대로 싣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뭐... 대다수 문서가 그렇긴 합니다만...orz 일단술먹고합시다 (토론) 2016년 8월 3일 (수) 01:56 (KST)답변

지도 편집

 
3세기경 부여국의 세력권(강역) 추정도

@일단술먹고합시다, Xakyntos, Asadal, Knight2000, Synparaorthodox: 핑을 건거 죄송합니다 ㅜㅜ 나름대로 지도를 만들어봤는데 오류가 있을까봐요.. 낙랑군 문서에서 지도 이미지를 가지고 토론을 하더라고요. 지도에서 왜곡이나 이상한 내용이 있는지는 저도 사실 잘 모르는지라... 역사를 잘아시는분들이 이 지도의 문제점이나 그런것들이 있는지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고려 (토론) 2016년 7월 24일 (일) 15:42 (KST)답변

고대사에서 국가의 강역 문제는 언제나 어려운 문제입니다. 대체로 부여의 위치가 만주였음은 명확하고, 서기 167년 한나라의 현도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285년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국왕이 자결하고 왕자들이 옥저로 피신했다고 하니, 대체로 한나라, 선비족, 옥저의 중간 위치에서 이들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6년 7월 24일 (일) 20:44 (KST)답변
일단 출처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003년, 4권 171쪽과 고구려역사재단 《고조선·단군·부여》 2004년, ISBN 899144802X 을 쓰고 있습니다. 출처상의 문제는 없는거지요? 그리고 이 출처와 제 지도가 다른건 아니겠지용? 만약 왜곡되면 ㅜㅜ--고려 (토론) 2016년 7월 24일 (일) 23:58 (KST)답변
출처가 분명하니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여는 고구려처럼 고대국가 수준까지 발전하지 못한 채 망해버린 나라인지라, 영역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표기하는데 처음부터 한계가 있습니다. 출처에서도 세력권이라 쓸 뿐 영토라고 쓰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아도... --Xakyntos (토론) 2016년 7월 25일 (월) 10:45 (KST)답변
'국경'이란 개념이 명확해지는 것은 상당히 후대입니다. 특히 존나 옛날 및 고대는 국경 긋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적절한 위치에 국가명이 있고, 국경 표시가 없는 버전이 가장 왜곡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하는 방안입니다. 시각화된 자료인 지도를 생산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왜곡된 시야를 전달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외국어 위키들은 잘 안 지키는 것 같긴 합니다만... 일단술먹고합시다 (토론) 2016년 7월 26일 (화) 00:03 (KST)답변
국경이 아닌 세력권 입니다..--고려 (토론) 2016년 7월 26일 (화) 13:45 (KST)답변
국경이나, 세력권이나, 강역이나요. 선으로 처리하는 것은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냥 적절한 위치에 국가명이 있고, 표시가 없는 버전이나 File:Hangunhyeon.PNG와 같이 대충 둥글게둥글게 표시해놓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일단술먹고합시다 (토론) 2016년 7월 28일 (목) 05:40 (KST)답변
국경이 아닌 세력권이므로, 진하고 굵은 선 대신 둥글고 흐릿한 면으로 표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6년 7월 30일 (토) 19:09 (KST)답변

외부 링크 수정됨 (2019년 4월) 편집

안녕하세요 편집자 여러분,

부여에서 2개의 링크를 수정했습니다. 제 편집을 검토해 주세요. 질문이 있거나, 봇이 이 문서나 링크를 무시하기를 바라신다면 간단한 자주 묻는 질문에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세요. 다음 변경사항을 적용했습니다:

봇의 문제를 수정하는 것에 관해서는 자주 묻는 질문을 참조해 주세요.

감사합니다.—InternetArchiveBot (버그를 제보하기) 2019년 4월 12일 (금) 13:11 (KST)답변

상서대전(尙書大典)의 武王克商 은 상나라(은나라) 무왕을 지칭하는 게 아니에요?? 편집

본 문서의 기원 문단에서 인용했고 중국어 위키문헌의 산해경에서 인용했습니다.

有胡不與之國

— 山海經/大荒北經 海經‧大荒北經

위 내용을 번역하면 「오랑캐(胡)의 나라(國)인 불여(不與)가 있다.」

불여(不與)의 보충 설명은 부여와 곰고을의 사람들 기사를 참고바랍니다.

武王克商 海東諸夷夫餘之屬 皆通道焉

— 《상서대전》(尙書大典)

위 내용을 번역하면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상나라(商)를 물리쳤는데(克) 상나라는 동쪽의 오랑캐인 부여(夫餘)에 속해있으며(屬) 모두 오랑캐(夷)로 통한다」라고 하네요. 번역이 잘못 될 수도 있으니 헤아려주세요.

그런데 삭제 되었네요.

그리고 다른 외부 정보에서 보면

从五星聚房與帝辛占星陶文看武王克商日, 公元前1018年2月22日

— 은도학간(殷都學刊) - 박대종 소장

한국인이 해냈다, 미션 임파서블 ‘서주사 절대기년’ 은도학간 등재 기사도 참고바랍니다.

이렇게 보면 모두다 상나라 무왕을 지칭하는게 아닌가요?? --220.77.147.171 (토론) 2019년 5월 25일 (토) 06:02 (KST)답변

부여(扶餘,夫餘)는 현대 국가나 민족 틀 고정 관념 버려야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편집

기원전 국가들을 수천년 후에 기록이나 유물 추정만으로 규정할 순 없습니다.

저는 완전 비전문가지만, 성씨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파고 있는데, 부여는 중앙아시아와 관련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부여계 성씨 온(溫)은 고구려 신라 백제 주요 인물인 온조, 온달, 온군해가 있고, 강국(康國) 소무구성 왕실 성이 온(溫)이고, 소무성은 중국 간수성으로 한반도와 아주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온(溫)씨는 월지국 출신으로 언급되고 있고, 사마르칸트, 소그드, 월지국은 중앙아시아에 분포하다 흉노에 패하면서 서쪽으로 밀려났습니다. 부여 전신인 고리국은 BC500년 이전 헤이룽장성 쑹화강 유역에서 시작된, 흉노 보다 더 먼저 존재한 국가입니다. 동부여 대소왕 동생이 압록강에 도착해서 세운 것이 갈사부여, 이런 부여 계통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진 몰라도, 한반도 삼국시대에 영향을 줬고, 돌궐에 밀려나 서쪽 간수성에 있는 소무성까지 밀린 것을 보면, 과연 부여가 만주에만 국한됐던 국가인가? 의문이 듭니다.

부여(夫餘)가 여(餘)를 부(夫)돕는다는 뜻 있다니까, 부여는 한자의 음차만 빌려 쓴 것이라는데, 기자(箕子) 이름인 서여(胥餘)의 여(餘)를 우연히 쓸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기자(箕子)는 상나라 왕족이고, 제가 본 상나라는 황하 북부 지역과 산동성 지역에 주로 분포한 북방계로 인지되고 있고, 주나라 반란으로 상나라가 망하면서, 단기를 서기로 바꾼 1122년에 기자는 만주 요하에 이동했고, 후조선은 중앙아시아 월지국이 팽창하면서 영향이 고조선에 있었고, 부여의 일부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기자(箕子)+부여(夫餘)가 태행산맥 외곽으로 넓게 분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 흐름에서 나중에 흉노가 팽창하면서, 월지 종족이 동서로 나뉘면서, 서쪽 간수성에 소무구성, 동쪽 부여계 국가들에 온씨를 남기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중앙 아시아 유목 지역과 고조선 사이 교류 할 정도로 인접했을 때 가능한 것으로,

부여는 상나라=은나라 달력을 사용했다는 것을 보면, 부여와 상나라 왕족 기자는 상관 관계가 있습니다. 물론, 혈통은 차이가 있지만, 만주 지역은 역사를 봐도 여러 혈통이 항상 교체되는 지역으로, 교류하거나 섞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온전히 한자를 썼는지, 정말 100% 음차만 빌려썼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 음차를 썼다는 것은 추정일뿐이지, 사실인진 100% 확신 할 수 없는 학자를 고정관념일 수 있습니다.

만주와 중앙아시아에 존재했던 국가들 이름이 성씨 역사에도 흔적이 남아있고, 성씨 개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면, 기원전 고대사를 규정 짓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주나라 시기를 1046년으로 특정했지만, 단기로 기록된 것은 1212년=BC1122년이고, 기자는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요하로 도망갔습니다. BC500년 경에 세웠다는 고리국이 스키타이 영향을 받았던 인도 계열 영향을 받았던 월지국과 상관 관계는 있고, 기자 보단 나중에 도착 형성된 편이라, 여(餘)를 부(夫)돕는다는 뜻이 불가능한가요?

황하 중류지역에 있던 한반도 크기 하나라를, 상나라가 어디부터 어떻게 점령해갔는지를 보면, 화허족인 주나라와 하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전조선은 중원에 있었던 상나라 일 가능성 있지만, 고정 관념으론 그냥 환단고기 환빠일뿐이죠?

성씨는 옛날엔 왕과 귀족들의 전유물, 노예는 성씨가 없었고, 조선시대 양반은 10%도 안됐다 합니다. 그렇다면, 5~10% 성씨도 모두 허위가 되는 것인가요?

한반도 삼국시대는 분파로 구분하면서, 성씨를 바꾸지 않게 됐지만, 성씨는 나라를 세우거나, 나라가 망하면 성에서 씨로 바뀌는 것이 기본입니다. 따라서, 중국 성씨 혈통과 나라, 지역, 파생된 성씨들을 살피다 보면, 부여는 기자와 공동체를 형성했고, BC300~249년 연나라 진개 요하 침공때부터 기자와 개별적인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BC194년 위만 반란에 고조선이 망하면서, 완전히 별개 국가를 시작, 위만조선, 부여, 옥저, 동예, 삼한이 병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장에서 발로 뛴 전문가가 아니라서 헛소리처럼 생각될 수 있겠지만, 여러 곳에서 자꾸 그런 흔적이 보이니까, 연구는 해보세요. 상나라는 황하 중류지역에 형성됐던 하나라와 주나라 입장에서 보면 북적, 동이, 이민족으로, 하나라를 상나라 탕왕이 멸망시키고 처음 세운 수도는 현재 상추시, 동쪽에서 공략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주나라는 서쪽 오르도스와 기산 서융지역에 주로 분포했습니다. --Tol6560 (토론) 2019년 6월 30일 (일) 15:32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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