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유재흥

마지막 의견: 2년 전 (InternetArchiveBot님) - 주제: 외부 링크 수정됨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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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성 이의 편집

현리 전투는 국군과 중공군 비율이 거의 1:9에 육박하는 상황이었고, 유재흥 아닌 누구라도 패배를 피할 수는 없는 상황으로 평가받는 전투입니다. 한미연합사의 형성은 말 그대로 연합 군대의 지휘통제를 일원화하기 위한 필연이었지, 유재흥 한 명의 졸전 탓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유재흥이 일본 육사를 졸업하여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라간 것은 사실이나 해방 당시 일개 대위가 "정치군인"으로 행세할 수 있었을 리가 있습니까. 오히려 유는 4.3 사태 당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힘썼으며, 이는 제민일보를 비롯한 제주 현지 단체들과 연구기관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단순한 호사가의 안주거리 수준인 밴플리트와의 대화를 실을 필요까지 있습니까? Ø샐러맨더 (토론 / 기여) 2015년 2월 28일 (토) 21:07 (KST)답변

그렇게 따지면 패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전투가 몇개나 되겠습니까? 현리 전투는 중공군이 절대적으로 우세했으니 유재흥이 죽기살기로 싸웠더라도 졌다. 그리니 자기라도 살자고 부하들 다버리고 도망치는 것이 당연하다.
뭐가 중립이라는 말인지 모르겠네요. 4.3 사태때 민간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힘썼으니 그리도 잘했지 않나?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 인간은 6.25 전쟁 종료와 함께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이등병강등시킨 후 총살 처리 했어야 마땅한 인간으로 보입니다.
그런인간이 참모총장에 국방부 장관까지 하는 이 나라가 제정신인건지 어의가 다 없습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116.123.165.211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는데, 이 때에도 팽덕회는 연합군의 약점으로 한국군을 지목하고 한국군의 방어지역 공격을 선택합니다. 1951년 5월 16일부터 한국군 제3군단 수비지역인 인제군 일원에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는데, 중공군은 한국군 주력을 우회하여 한국군의 퇴로부터 먼저 끊고 그 후 공세를 시작함으로써, 한국군 3군단은 중공군에 포위되었습니다. 이때 중공군 100여명은 오마치고개를 점령하게 됩니다.(500명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당시 한국군은 2만 5천명이었습니다. 상황을 정리하면 2만 5천명의 한국군은 100여명(500?)의 중공군을 막지 못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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