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학살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모바일 앱
태그: 모바일 앱
16번째 줄:
[[1919년]] [[3월 31일]] 정오 경, 발안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발안 장날 시위에 대해 논란이 있으나 당시 일제 측 기록과 발안 장날에 대한 실증적 고찰에 따라 3월 31일에 일어났다. 발안 장날은 5일과 10일에 여는 5일장으로 음력으로 개시되었으며 현재와 같이 양력장이 된 것은 1937년 이후이다. 이러한 학술적 진척에도 불구하고 당시 역사가 통일되고 정리되지 않고 있다.) 만세 운동은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계획하였고, 3월 31일 정오 이정근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이 따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위협 사격과 군중의 투석이 이어졌다. 시위대는 인근 일본인 소학교에도 불을 질렀다.
 
일본군 수비대는 주재소로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으며, 이정근과 그의 제자 김경태 등제등 3명이 칼에 맞아 사망했고,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기독교인]]), 김성렬(천도교인)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 났다.
 
이때 흥분한 시위 군중이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 파손하였고, 정미업자 사사카(佐板) 등 43명이 3리 밖 삼계리 지역으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사카는 그 보복으로 4월 15일 제암리사건 당시 일본군대의 길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